의식 상승

삶이란 웃지못할 코메디

빛몸 2017. 8. 5. 07:44




모르면 몰라도 알고보면 삶이란 그야말로 '웃지못할 코메디' 다.

그런 지속적인 자각 속에서 살아가지는 못한다해도 그렇다.


대부분 인간의 삶은 에고에 기반하며

에고가 기반이 되는 삶이란 자기 그림자에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삶과 같다.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가?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쉽게 와 닿게는 느끼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 존재의 무지란 그와 같다.

모든 고통은 '상황에 대한 자기해석'이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사악하고 무례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고통이 될지 아니면 '기쁨'이나 '자기를 알 기회'가 될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있다.

에고는 고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그 상황을 피해야할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개다.


사실 에고만이 그것을 고통이라고 느낀다.

아니 사실 에고는 자신의 타고난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고통으로 만든다.

그래서 쾌락조차도 얼마지나지 않아 고통이 되는 것이다.


에고란 '무지한 욕망'이다.

나는 그 사실들을 3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헤메고 난 다음에야 겨우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에고기반의 인간은


 

한쪽 손으로는 자기 목을 조르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상대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자신이 그것을 고통으로 해석하고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에 깨어있지 못한 채 상대나 세상에 화살을 돌려 자신의 악이나 고통을 투사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실상이라면 믿겠는가?

모른다면 인간이 그만큼 깊이 잠들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악은 없고 무지만 있다.

모든 고통은 자신이 만든다.


그러므로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망상적인 그런 자기해석을 내려놓아야 한다.

에고기반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광적이다.

믿지 않겠지만 그렇다.

사람마다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신이상'이다.

그것이 에고다.


그리고 에고는 인간공통이다.

그래서 자기 에고를 깨닫기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인간이 동일시하는 그 에고가 참나를 가리고 있다면 그렇다.


유일한 딜레마는 인간이 자신의 에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때 세상의 혼란과 잔인한 투쟁은 끝난다.

현실과는 별개로서 적어도 이치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깊이 이해했을 때 

삶이란 당연히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에고가 자아내는 것이라는 것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고통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지가 몸의 욕망에 의존하면서 에고가 만들어지고 동시에 삶도 만들어진다.

결국 인간의 삶은 무지에 관한 것이자 욕망에 관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너무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악의를 인정하고 더 이상 자기 내면에 악의가 없거나 악의가 줄어들게 되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악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그 '악'이란 곧 나의 '무지'일 뿐임을 깊이 통찰해버리기 때문이다.

무지만 있을 뿐이지 인간이 말하는 그런 악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악마화'하는 자기 악의의 외부적인 투사를 꺼리게 된다.

인간이 '악마'라고 부르는 존재는 무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 일 뿐이다.

그렇지만 에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사실 긍정(선)과 부정(악)은 인간의 에고 안에서만 존재 가능하다.

사랑은 에고를 초월한 영역이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란 에고의 욕망에 더 가깝다.


악을 품는 그 자체와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다.


악과 고통에 대해 자신의 에고에 대해 깊이 이해한 사람은

악한 상황이 오더라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여하튼 모든 부정성을 알아차리고 피하려고 한다.

'지켜보는 자' 로 물러나 상황을 그냥 흘려보내고 애쓴다.


그러나 에고에 의존하는 이상 그 모든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에 대해 무지한 존재만이, 고통이나 악이 외부에 어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큰 저항감을 품게다.


그러나 삶이 주는 체험을 깊이 들여다 보면

세상이란 '자신의 에고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 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내가 세상에서 보고 느끼고 반응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 일 뿐임을 알게 될 때

그야말로 울수도 웃을 수도 없게 된다.

 자신의 악의를 인정하고 초월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이 지구를 졸업할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세상이 아무리 심각해 보여도 삶이란

'에고의 체험이자 그 에고를 초월하는 것에 관한 것일 뿐이다.'

세상은 에고이며 그러기에 사랑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이 일상에서 이어진다.

인간이 에고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며

인간의 모든 체험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