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의 다양성
봉사 행위에 대한 카르마는 언제나 더 큰 봉사의 기회를 낳는다.
이것은 수많은 전생 조사를 통해 카르마의 작용을 연구한 결과
우리가 확신하게 된 법칙의 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남달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다음 생에 반드시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게 더 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로고스는 자신의 일이 누군가에 의해 행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의 기회를 바란다면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하고자 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식은 우리에게 기회와 함께 책임을 부여한다. 당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 항복하거나 더 큰 도약력을 얻는답시고 뒤로 한 발 물러선다면 당신에게 찾아 온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다시 같은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쩌면 수많은 생이 소요될지 모른다.
만일 당신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지식이나 비전(Vision)을 무시한다면 분명 다음 생에 태어나도 그것들을 얻지 못 할 것이다. 지식은 항상 사용되어져야만 한다. 실천을 유보한 채 지식을 간직하기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카르마에는 유달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특별한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동물에게 어떤 잔인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라오는 카르마는 매우 끔찍하다. 그것은 종종 심한 격통을 동반한 만성 질병이나 정신 이상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특히 그 잔악한 행위가 치밀하게 의도적인 경우일 때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Hypatia)를 박해했던 무지한 많은 사람들은 다음 생에 아르메니아에 태어나 터키인들에게 온갖 잔인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오늘날 사고로 끔찍한 고통 속에 불에 타 죽는 자들은 중세 시대에 사람들을 화형시킨 자들이거나 무시무시한 순교 장면들을 히죽거리며 지켜보았던 자들인 경우가 많다.
특히나 영성이 매우 높은 사람에게 가해진 악행의 경우 그 가해자에게 돌아오는 반작용은 실로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 앞에 올지 모를 위대한 존재에 대해 주의 깊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존재는 우리보다 까마득히 앞서 있다.
그는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어렵고 오해할 수 있다. 위대한 존재들이 사람들 사이에 자주 나타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박해의 카르마가 가공할 만한 것임과 우매한 인류가 그런 결과를 자초할 게 뻔함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한 위대한 영혼이 이해 받지 못하는 곳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잔인하고 무능한 어떤 교사의 손에 모욕당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잔인한 행위에 따르게 될 악 카르마를 보도록 허락 받았는데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다음 말씀이 사실 그대로이다.
‘누구든지 이들 중 하나를 해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은혜를 저버린 카르마 또한 그와 같이 항상 과중하다. 특히 오컬트 스승에 대한 배은망덕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마스터들과 만나기 위해 계속 몰려들며 그들의 관심을 얻길 바란다. 사람들은 종종 마스터들에게 다가가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제자들이 애써 저지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스터의 제자는 오직 타인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마스터의 발 밑에 한 사람이라도 더 인도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대한 존재들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이 행여 마스터에 대해 불손하고 거만하며 트집잡길 일삼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자는 그로 인해 초래될 심각한 결과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어디 가도 나쁜 카르마를 만들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자칫 악 카르마를 백 배나 증폭시킬지 모를 그런 자리에 그를 앉혀 놓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양의 악 카르마를 지고 있는 자는 사실상 그것을 소진시킬 때까지 오컬트적으로 진보할 수 없다. 누구도 악 카르마를 지고서는 아데프트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데프트란 윤회의 필요성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코잘체를 벗어 던지고 붓디체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코잘체를 취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당연히 저급계들에서의 모든 카르마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마스터는 자신의 모든 힘들을 개곡선(開曲線)으로 발출시킨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폐곡선(閉曲線)으로 발출시킨다. 이는 일반인들의 저급한 상념에 기인한 것이다. 결국 좋든 나쁘든 처음 발출된 힘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것을 받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사람은 저급계들에서 완전히 무자기(無自己)가 될 때까지 결과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한다. 타인을 도울 때 그와 완전한 일체성을 느끼는 사람은 그 행위의 결과를 멘탈계 상에서만 받을 뿐 그 이하의 계(界)에서 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스트랄계에서도 카르마를 지을 수 있음을 잊지 말라. 사람은 의식이 계발되는 곳, 행위를 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카르마를 지을 수 있다. 나는 아스트랄계에서 이루어진 행위들이 다음 생(물질계에서의 삶)에 카르마적인 열매를 맺는 예들을 직접 보아 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떤 사회나 국가에든, 거기에 속한 일반 카르마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그 구성원 각자에게는 어느 정도 전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명의 사제는 전체 성직자들이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갖고 있다. 이때 비록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행위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회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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