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우리가 진짜 깨달음을 원하는 것일까?

빛몸 2018. 8. 17. 05:56




우리가 진짜 깨달음을 원하는 것일까?


 

 

지금 주제와 상관이 있는 어떤 얘기가 생각납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골격만 생각나서 세부는 제 창작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한 깨달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왔는데 이제 노쇠해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습니다.

 

이 전에도 몇 차례 제자들에게 “이제는 힘들어 몸을 벗으려 한다.”고 통보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이 애걸복걸, “스승님이 안계시면 저희는 어쩌란 말입니까?” 하여 그 뜻을 굽혔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몸 벗음을 미루고 제자들을 지도했건만, 수행에 큰 성취를 보인 제자는 찾아볼 수 없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통보를 하게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제자들은 울고불고, 어떤 자는 혼절까지 하면서,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고 제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라고 매달렸습니다.

 

이에, 스승께서는, “너희들의 뜻이 갸륵하여 내 법계(法系)의 이치에는 어긋나지만, 너희 중 진정으로 깨달음을 원하는 이가 있다면, 내 가는 길에 그를 동행할 수 있게 하리라.”

 

“허니, 진정으로 깨달음의 길, 무아(無我)의 무여열반(無餘涅槃) 길에 들고자 하는 이는 3일 후 나와 동행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겠노라.”

 

“물론 이 길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함도 잘들 알고 있을 터이니, 이 점을 잘 생각해 보고, 사흘 뒤에 보기로 하자.”

 

제자들은 감지덕지, 스승께 고마움을 표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사흘 후, 스승과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래 다들 생각해 보았느냐?”

 

“누가 나와 함께 깨달음의 길로 갈 것이냐? 나와 봐라.”

 

“......”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스승은 수제자를 보고 눈짓으로 물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앓고 계시는 어머님이 오늘 내일 합니다. 그 마지막 가시는 길이나 보살펴야지, 제가 떠나고 나면 누구도 그걸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쉽지만 저는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제자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제가 두 딸 다음에 세 번째로 아들을 본 게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그 녀석 젖이라도 떼는 걸 볼 때까지는 제가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아쉽지만 깨달음은 그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핑계 없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예정대로, 법계의 이치를 어기지 않고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만약 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쨌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신께서는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답은,.....

아마 이 얘기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 허망한 얘기지요?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런 천재일우의 기회, 로또 복권이 당첨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러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뭐 크게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 때가 되어야지, 불교 용어로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맞아야 되겠지요.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됩니다.

 

그 얘기를 좀 더 해 보기로 하지요.

 

저 뿐만 아니라 이런 정도 경계(境界)에서 뭘 해 보려고 했던 이가 꽤나 많았던 모양입니다.

 

돌고래를 사랑했던 과학자, 또는 미치광이 과학자로 알려진 존 릴리(John C. Lilly)란 이가 있습니다.

 

돌고래가 사람 못지않은 지능을 가진 존재란 것을 알아내기도 하고,

뇌과학 분야에 일가견을 이루기도 했던 천재 과학자,

돌고래를 소재로 한 플리퍼(Flipper)란 TV시리즈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도 했던 그였는데,

깨달음에 대한 열망도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망 운운 한 것은 그가 개발한 격리탱크(Isolation Tank)란 것을 보고,

제가 그리 추측한 것입니다.

 

여하튼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그 격리(隔離)탱크란 것에 대해 얘기를 해 보기로 하지요.

 

릴리가 개발한 격리탱크란 것은 물탱크에 우리 몸 온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채우는데,

그 물에는 황산마그네슘을 첨가 비중을 높여서 우리 몸이 중력을 느끼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탱크에 옷을 벗고 들어간 다음 뚜껑을 닫으면 빛과 소리까지 차단됩니다.

 

이렇게 되면 일체의 감각이 다 사라지게 되고, 깨달음에 버금가는 신비한 뭔가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릴리는 물론이고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천재 물리학자라고 하는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교수도 이 탱크에 들어가 신비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또 일본의 박식한 지성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도 이 탱크에서의 경험을 하고,

그 내용을 그의 저서 『임사체험』(윤대석 옮김, 청어람미디어)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치를 사용할 기회가 있다면, 아마도 큰 진전이 있을 것 같지만,

만약 거기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두려움 같은 것,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그런 염려도 됩니다.

 

여하튼 이 격리탱크란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줍니다.

 

이 대목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생각납니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일체 고액(苦厄)을 벗어날 수 있다(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격리탱크에서의 조건은 모든 것,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을 떠난 조건을 만족시키지는 않지만,

거기에 가장 근접한 조건을 마련해 줍니다.

 

반야심경의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조건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의 조건은

거의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충족되지 못하는 조건은 의(意)와 법(法)이 될 터인데, 결국 그게 나(我)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마지막 핵심, 그 끈질긴 명(命)줄을 놓아버리면, 그게 바로 해탈(解脫)이고 열반(涅槃)일 터인데,

그걸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걸, 많은 경우, “발심(發心)이 부족하다.”라든가, “그릇이 작다.” 또는 “수행(修行) 자세가 돼먹지 못하다.”.... 등등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그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에도 그랬고, 앞서 예를 든 에크하르트 톨레도 그렇고,

많은 경우, 더 이상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완전 적막감, 절망, 그

래서 모든 것을 놓아버릴(放下着) 수밖에 없는 지경을 겪으면서 깨우쳤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수월하게 깨우쳤다는 분들도 계시기는 합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우는 제게 해당되질 않는 것 같아 잊기로 했습니다.

 

여하튼, 그런 완벽한 절망적인 경지를, 깨우치기 위해서 간절히 염원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의 방향을 조금 달리 해 봅니다.

 

그런, 나(我) 같은 존재는 없어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정도의

절대적 절망상태가 여태까지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즉 나란 존재는 그정도의 험한 지경을 겪지 않은, 꽤 운이 좋은, 복 많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랬으니까 지금 이렇게 나(我)가 존재하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삶이란 것은 꽤 살아볼만한, 거기서 충분한 즐거움, 존재가치를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다행히 그간의 마음공부를 통해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평안하게 사는 법도 익혔으니,

오로지 그렇게 사는 것만 생각하고 즐겁고 평온하게 살면, 그것으로 족(足)하지 않을까요?

 

공연히 이런, 거의 불평할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그냥 한없이 계속된다는 것에 낙담하여

(사실 이건 낙담할 꺼리도 되질 않지요, 잘 생각해 보면)

유일한 탈출구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을 기웃거린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나중은 나중에 맡겨라!

 

그 나중(未來)이란 게 올지 안 올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평온, 그 외에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절망이여 올 테면 와 봐라!

 

그런 완벽한 절망이 온다면, 그건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네!

 

그때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걸 나는 안다네.

 

혹여 복에 겨워, 이 평온이 그냥 한없이 계속될 거라는 그런 절망감이 찾아오면, 지금 이 얘기를 생각하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지금 여기의 평온을 요모조모, 구석구석, 혹 놓친 건 없는지, 그런 걸 찾으면서 살렵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얘기 하나를 같이 하렵니다.

 

 

나는 여러 번에 걸쳐서, 라빈드라나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아름다운 시를 얘기했다. 그 시인은 수백만 번의 삶을 살아오면서 신을 찾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저 멀리, 별 가까이에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그 별에 도착할 때 쯤이면, 신은 어떤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찾고 또 찾았다 - 그는 신의 집을 찾기로 결심했다 - 그리고 정말이지 너무도 놀랍게도, 어느 날 그는 실제로 어떤 집에 도착했는데 그 문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 ‘신의 집’

 

그대는 그의 환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그가 막 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갑자기 그의 손이 얼어붙는다.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떠오른다 - ‘만약 우연하게도 이것이 정말로 신의 집이라면, 그러면 나는 끝이다, 나의 추구는 끝이다. 나는 나의 추구와 동일시되어 버렸다. 나는 그 밖에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한다. 만약 저 문이 열린다면 그리고 내가 신과 대면한다면, 나는 끝이다 - 추구는 끝난다. 그 다음에는 뭔가? 그 다음에는 영원한 지루함 - 아무런 흥미도 없고, 아무런 발견도 없고, 아무런 새로운 도전도 없는 지루함만이 있게 된다, 왜냐 하면 신보다 더 커다란 도전은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으로 떨기 시작한다. 신발을 벗어 든다. 그리고는 그 아름다운 대리석 계단 아래로 다시 내려간다. 그가 신발을 벗어 든 것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냐 하면 그가 두려워한 것은, 계단 위에서 조그만 소리라도 난다면... 신이 문을 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전에 그렇게 달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빨리 달린다. 예전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빨리, 신을 쫓아 달려 왔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그는 전에는 결코 쓸 수 없었던 에너지를 끌어낸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아직도 신을 찾고 있다. 나는 그의 집을 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피해서 그 밖의 다른 모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 흥분은 대단하다. 그 도전은 위대하다. 그리고 나의 추구 속에서 나는 계속된다. 나는 계속 존재한다. 신은 하나의 위험이다 - 나는 소멸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신조차 두렵지 않다. 왜냐 하면 나는 그의 집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집은 제쳐 두고, 나는 그를 찾아 계속해서 우주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곳에서 나는, 나의 추구가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추구는 나의 에고를 키우기 위한 것이다.”

 

 

- 오쇼 <많은 일들이 그리고 아무 일도>  ( 지음/ 이종수 옮김, 황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