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스크랩] 깨달은 존재의 마음

빛몸 2018. 8. 15. 09:18


지반묵따(깨달은 존재)의 마음

 

아마나(amana)는 ‘마음이 없는’을 뜻하는 산스끄리뜨 용어이다. 아마나스까따(amanaskata)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의식 없음이다. 이것은 지반 묵따(jivanmukta 깨달은 존재)의 상태이다.

 

잔류 삿뜨와sattwa

 

지반묵따는 살아있는 동안 삶과 죽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현자이다. 저속한 욕망의 본능적인 마음이 그에게서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그의 영적인 삿뜨윅한 마음은 소멸되지 않는다. 꽃과 열매가 씨앗에 잠재해있는 것처럼,지성의 원인인 삿뜨와의 잔재는 항상 가슴에 있다. 갸나(지혜)를 획득하자마자 마음이 완전히 소멸된다면,지반묵띠 상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반묵따가 마음이라는 도구 없이 어떻게 세속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갸니(jnani)는 편재하는 브라흐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세속적인 활동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도구로 사용한다. 반면에 아갸니 (ajnani 무지한 사람)는 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갸나를 획득하고 전체적인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활용한 라자 자나까(Raja Janaka)와 같은 지반묵따의 경우가 있었다.

 

스리 라마와 스리 크리슈나는 그들의 왕국을 지배할 때조차 항상 브라흐만 안에서 휴식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만의 본성인 그들의 본질적 삿-칫-아난다(진리-의식-희열) 를 항상 의식했다. 그들이 다양한 활동을 이행할 때 그들의 몸과 마음은 도구로 활용된다.

 

 

실증적인 존재와 존재-진실

 

지반묵띠 상태에서 세상은 추측한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실증적인 세상은 소멸하지만,이것은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절대 존재처럼 단지 존재의 모양과 색깔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실증적인 존재이지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진실은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의 제한된 모습은 사라진다. 외형은 사라져야한다. 공간적이고 일시적인 사물의 모습은 사라져야한다. 다른 것에 의해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결정은 사라져야한다. 다양성과 단일성은 사라져야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지닌 우주는 깨달은 존재조차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것의 형태와 의미, 중요성이 바뀔 것이다. 잘못된 관점,제한된 시야, 잘못된 생각,국한된 비전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진실,존재는 변함없이 본질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점은 변할 것이다.

 

갸니의 마음은 마음이라 부를 수 없고 땃뜨와 (tattwa 물자체)라고만 한다. 다양한 사물을 통해 식별하는 것은 마음이다. 반면에 연금술 과정을 통해 구리가 금으로 변하는 것처럼 갸니(지혜을 얻은 자)의 마음은 녹슬지 않는다. 갸니의 마음은 그 자체로 삿뜨와이다. 반면에 갸나(지혜)가 없는 사람은 그들의 마음에 의해 설계된 길을 따라갈 것이다. 갸니가 외부를 볼 때 그는 단순히 보지만, 브릿띠 (vritti)는 세속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들처럼 대상을 인식하는 형태를 띠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깊은 잠 상태에서 마음과 대상과의 동일시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갸니는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또한 그런 어떤 동일시로부터도 자유롭다. 그에게 세상은 단지 꿈으로 나타난다. 그는 일하는 동안 조차도 브라흐만 속에 산다. 자신의 진아를 인식한 사람은 그들의 까르마를 이행할 순수한 바사나로 재탄생에 그들을 수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갸니의 마음을 삿뜨윅 (sattwic)이라 부른다. 그러나 갸나가 없는 마음은 일반적으로 마나스(manas)라 칭한다.

 

 

완벽하게 조화로운 마음

 

이제,지반묵따의 마음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조화롭다. 그것은 언제나 차분하고 상대방 짝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 그것은 크게 기뻐함과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즐거움으로 크게 기뻐하거나 슬픔이나 비통함으로 우울해하지 않는다. 쾌락의 즐거움이나 고통 안으로 들어감에도 그들에 의해 영향 받지 않고 지반묵따의 마음은 그들로 인해 단련된다.

 

고통에 대한 내적인 만족과 자유를 통해 모든 상황과 모든 장소에서 갸니에게 마음의 평정이 유발될 것이다. 그의 몸에 대한 그들 자신의 남은 애착과 고통이 그의 얼굴에 나타날 때조차, 그의 마음은 결코 그들이나 그들의 대립에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순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분노나 갈망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 어떤 욕정의 충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갈망도 없다.

 

그의 마음은 세속 적인 것들 너머에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는다. 그는 독립된 방이나 자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는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그는 감각 철회를 수련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마음은 겉보기에 다양 한 대상을 즐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즐거움은 현실이 아니고,브라흐만 그 자체의 상태일 것이다.

 

 

2중 의식

 

오컬티스트는 자기억제와 수행을 통해 한 번에 두 가지 영역을 일하는 것에 대해 배운다. 그가 육체 영역에서 일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육체를 부분적으로 벗어나 그가 글쓰거나 말하는 동안, 아스트랄체로 그는 다른 것을 할 것이다. 그러한 오컬티스트인 경우일 때, 그 자신의 스와루빠(swarupa 본질적 본성)에 머무는 완전히 발달한 갸니라고 말할 필요가 거의 없다. 갸니는 2중 의식이 있다. 그는 세상뿐만 아니라 브라흐만에 대한 의식도 있다. 그는 그 자신 내부에 있는 꿈으로 세상을 본다. 갸니는 항상 사마디 상태에 있다. 라자 요기 (raja yogi) 와 같은 갸니에게는 ‘사마디 안’과 ‘사마디 밖’이라는 것은 없다.

 

당신이 풍금을 연주할 때,곡조를 먼저 조절한다. 목소리의 세기와 힘에 따라 두 번째 리드(reed)나 네 번째 리드에 고정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다양한 리드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삽따 스와라 (sapta swara 7음)가 지금 발음된다. 당신은 다양한 라가 (raga)와 라기니 (ragini)를 연주할 수 있다. 주된 슈루띠(shruti 악보)를 아는 그는, 아뜨만이나 이 세상 의 유지를 아는 갸니와 비교할 수 있다. 기초적인 슈루띠만을 알지 못한 채 삽따 스와라를 아는 사람은 아뜨만을 모르고 감각 대상만을 아는 아갸니 (ajnani) 와 같다.


당신의 눈으로 물체를 볼 때, 태양의 빛을 통해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2중 드리슈띠(drishti 시야)가 있다. 마찬가지로 갸니가 세속적 활동을 이행할 때 항상 2중 드리슈띠를 지닌다. 그가 일할 때조차 그는 일하지 않음을 알고 애착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세상을 볼지라도 모두가 브라흐만이고 브라흐만이 그이다.

 

 

합일의 경험

 

신(God)에 도취된 지반묵따는 나무,돌’ 소년, 아이. 소녀,소,개 등 사실은 모든 것에서 신을 본다. 그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으며,가려진 힘이나 죽음의 물질은 없고,모든 것이 살아 있고, 진동하고 있으며 지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보편성의 감각과 영원한 생명의 의식을 경험한다. 우주 의식을 지닌 그는 모든 우주가 그라는 것을 느낀다. 그는 최고의 주님과 하나이고,보편적 지식, 생명과 하나이다. 그는 천상의 눈을 획득하고 이해나 묘사를 넘어선 더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출처 : 자각과 변형
글쓴이 : 허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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