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아 대사님

제15장 : 두 가지 형태의 어둠 (2/2)

빛몸 2024. 1. 30. 18:57

하지만 타인들의 사랑스러운 행위를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아니오(no)”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빛뿐만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자신들에게 오고 싶어 하는 외부의 빛마저도 차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을 잃은 외로움이고, 고립감이며, 이것이야말로 지구에서는 지옥입니다. 여러분들 각자는 내면에서 오는 이러한 지옥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폐쇄의 과정이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아이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우며, 또한 이들의 감정도 아주 쉽게 흐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이러한 감정은 이들의 존재를 대개는 빠르게 통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장애물도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문도 닫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삶이 아이를 통해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 혹은 과거 생으로부터의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여러분은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린(개방)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활기에 넘치고, 자발적입니다. 왜냐하면 달리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방식, 통제 수단 자체를 아직까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처리 방법을 알지 못하는 감정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회를 통해, 어려운 감정들을 피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주위에 있는 어른들은 대개 그러한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으며, 그러한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꺼려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에 혼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상하며, 다르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영감과 열정, 사랑과 꿈이 충만해 있었지만, 그러한 꿈들은 그 이후 냉엄한 현실에 부딪치게 됩니다. 가족환경 속에, 그 이후 학교에,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편견에 대한 반응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본성과 맞지 않는 장애물들을 쌓게 됩니다. 내면의 문들은 닫히게 되며, 이러한 현상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만, 여러분 중에서 일부는 그것을 오래된 슬픔으로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이 아이는 여러분이 지닌 자발성(spontaneity)의 상징입니다. 이 아이는 외향적이고, 제약이 없으며, 활기에 넘치고, 또한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좋아(yes)”라고 말하는 존재입니다. 환희, 기쁨 그리고 즐거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도 좋아(yes)”라고 말하는 이 존재를 볼 수 있나요? 내면에 존재하는 이 아이가 여러분에게 오고 싶어 한다고 상상하세요. 이 아이는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환상입니다. 내면적으로는, 결코 어떤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잃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원래의 생명력(life stream)은 그대로 유지(보존) 되고 있으며, 여러분과 하나로 합쳐지고 싶어 합니다.

 

잠시,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여러분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상상하세요. 상상 속에서, 그 아이가 , 내가 누군지 기억하니?”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세요. 이 아이를 쳐다보고,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뭐니?”라고 물어보세요. 그 아이에게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즉 여러분이 오랫동안 밀어붙였을 수도 있는 뭔가가 있습니다. 잠시,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 아이는 살고 싶어 하는 여러분의 일부이며, 여러분 속에서 좋아(yes)”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가 말할 수 있게 하세요.

 

여전히 아이는 신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으로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개념들을 받아들여 왔으며,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이 삶에 대해 아니야(no)”라고 말할 수 있도록 키우고 있는 것이며, 내면에서 두 번째의 어둠이 자랄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두 번째의 어둠, 즉 삶에 반대하고, 고통을 더 이상 느끼고 싶어 하지 않으며, 실제로 이 삶을 피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일부를 느끼거나, 시각화하세요. 경직되고, 수축된 그러한 요소를 내면에서 느낄 수 있나요? 그러한 요소를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나요, 아니면 그러한 요소와 관련된 어떠한 색상이 보이나요?

 

여러분의 내면에는 너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지켜보고, 체험해왔기 때문에, 매우 지쳐 있으며,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여러분의 일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의 무게를 느껴보세요. 그 일부에게 좋아(yes)”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 일부를 즉시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부가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고 하세요.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고의적으로 폐쇄(고립)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절망감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차단되고, 움츠려들며, “아니요(no)”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자기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될 대로 되라고 하는 것)은 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사건들, 질병, 아픔, 고통 혹은 그 외의 어떤 것이든, 첫 번째의 어둠에 대해, 즉 오직 좋아(yes)”라고 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내가 요구하는 것은 두 번째의 어둠에 대해, 즉 고통스러운 사건의 결과로서, 스스로 삶과 차단된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에 대해, 그리고 더 이상 삶을 체험하고 싶어 하지 않고, 삶을 거부하는 어둠에 대해, “좋아(yes)”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그러한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주 부드러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강제 및 강압은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빛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빛은 구석구석 모든 곳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어떠한 판단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 이건 좋지 않아, 삶은 또 다시 흘러야 하므로,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어물(defense)이나 장애물을 부수지 않으면 안 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빛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빛은 단지 나는 이해해라고 말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너에게는 아주 힘들었을 거야, 나는 그것을 이해해. 나는 네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차단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긴장감으로 인해, 결국 네가 아주 지치고, 보잘 것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고 말할 뿐입니다. 빛은 부드럽고, 유동적입니다. 따라서 빛은 아주 심한 아픔과 고통 속으로 그리고 가장 경직된(굳은) 인간의 영혼 속으로 침투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빛에 또다시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내면에서 그러한 의지를 찾을 수 없다면, 즉 마음을 열고, “아니야(no)”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no) 역시도 존재할 수 있게 하세요. 왜냐하면 빛은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어떠한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깊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빛은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에도 그리고 빛과 전혀 교감할 수 없으며, 또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상황 속에도, 빛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빛은 여러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 우주와 창조된 모든 것들이 빛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 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빛과 삶을 신뢰하세요. 신뢰와 내맡김이 여러분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허용한다면, 그것은 문에 균열이 생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깊은 밤에도, 영혼은 언제나 여러분과 연결되어 있으며, 빛과 위안을 여러분에게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 문에 작은 균열이라도 생길 여지만 있다면, 빛은 그 틈새를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이외에, 여러분은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으며, 삶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삶에 아니야(no)”라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빛에 순응하기를 바라며, 여기에서 말하는 빛은 비단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벌거벗었으며, 취약해졌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깊은 감정들에 맞서 여러분이 나타내는 저항감에 대해서도, 좋아(yes)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다시 어린아이와 같이 되세요. 살아 있으세요! 모든 것들에게 좋아(yes)라고 말하세요. 자기 자신을 연민과 이해로 에워싸세요.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흐름과 움직임을 삶 속으로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닌 힘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는 의식의 불꽃, 즉 밝은 빛의 화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출처] 15: 두 가지 형태의 어둠 (2/2)|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