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앎의 발견

빛몸 2020. 8. 6. 09:40

앎의 발견



1997년 2월 5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큰 공동체의 이해와 관점을 얻는 것은 확실히 큰 공동체 자체를 준비하는 데 매우 필수적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신은 더 복잡한 정신환경 안에서 기능하는 데 필요한 분별력을 얻으려면, 단순히 자신의 지성이나 의지에서 나오는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하려면, 정신력이나 의지력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한 개인으로서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집단심의 힘, 즉 큰 공동체 안의 정신환경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실질적 역학관계를 나타내는 이 힘에 비하면, 당신의 힘은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당신은 내면에 있는 큰 힘, 큰 지성, 큰 능력을 불러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앎이라고 부른다. 앎은 당신의 아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이 앎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정보체나 일련의 생각들을 말하거나, 당신이 대학에서 배우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영적 마음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아마도 이 극소수 사람들은 자신에게 영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며, 아마도 이론적으로는 자신이 영적 존재이고, 자신에게 어떤 영원한 것이 있으며, 이것이 신과 자신을 연결해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앎이 여기서 진정으로 의미 있고 당신의 영성이 진정으로 이해되려면, 당신은 영성이 당신 내면의 마음, 즉 큰 마음, 당신이 생각하고 계산하는 개인적 마음 너머의 마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마음을 앎이라고 부른다. 앎은 당신 안에 있는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정신환경에서 기능하는 당신 능력을 이해하는 데 앎의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앎은 당신을 위해 삶의 진정한 사명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앎은 당신을 위해, 당신이 왜 세상에 왔는지, 여기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합의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일어날 모든 일이 미리 정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이 개별적 삶의 맥락 안에서 당신이 이루어야 할 어떤 일들과 맺어야 할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운명을 나타내며, 이 운명에 대한 앎과 이 운명을 발견하여 완수하는 힘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존재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음, 앎은 잠재의식의 마음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아니다. 앎은 잠재의식의 마음이 아니다. 잠재의식의 마음은 여전히 개인적 마음, 즉 육체적 삶과 직접 연결된 마음의 일부분이다.


앎은 당신의 영원한 마음, 영적 마음을 나타내지만,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마음이다. 앎은 삶의 목적과 사명과 방향을 가진 마음이다.


앎에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 당신은 앎이 당신을 위해 가지고 있는 큰 목적을 체험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은 이 목적이 당신의 목적이며, 삶에서 당신의 진정한 소망과 진정한 의지를 나타낸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앎의 회복은 영적 발견과 성장의 본질이다. 앎은 발견되어 회복되기를 기다린다. 당신이 앎의 학생이 되어 앎길을 여행하고 앎길을 따르는 법을 배운다면, 결국 당신의 개인적 마음과 내면의 큰 마음이 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완전히 통합될 것이며, 한 개인으로서 당신의 힘과 의미와 능력은 세상에서 충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앎은 이 순간에도 당신을 부르고 있다. 앎에 다가와 앎을 받아들이라고, 앎의 지혜와 조언과 방향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당신 내면의 큰 영적 부름이며, 그 부름은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고, 이 큰 공동체 출현을 사람들이 깨닫고 그것에 맞추어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큰 영적 부름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의 앎은 이 큰 공동체 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며,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또한, 당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알며, 이 역할을 해내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정확히 안다.


이런 것 중 무엇이든 하나라도 추리나 추론을 통해 알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어떻게 삶에서 큰 마음의 뜻을 찾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세상에서 기능하는지 이해하거나 이상화하려고 시도해볼 수도 있다. 또한, 인간사에서 신의 활동을 이해하거나 이상화하려고 시도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것들은 오직 알 수만 있다.


창조주의 의미와 존재와 의지는 오직 알 수만 있다. 삶의 참된 목적과 의미와 방향은 오직 알 수만 있다. 당신의 참된 관계, 즉 당신이 개발하고 참여하게 될 운명인 관계들은 오직 알 수만 있다. 당신의 참된 본성과 의미와 가치는 오직 알 수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여정이자 통로인 앎에 의지하여,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찾고, 여기에 있는 동안 맺을 운명인 참된 관계의 진정한 기반을 찾으려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이것을 찾을 수 없다. 당신에게 아무리 훌륭한 생각, 아무리 정교한 사유 과정, 아무리 우주적인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앎이 당신을 위해 간직하고 있는 것을 품거나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근본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생각하는 마음은 당신이 내면에 지닌 큰 현실을 표현하고, 삶의 어려움과 변천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삶에서 봉사하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마음은 결국 앎에만 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봉사가 없다면, 생각하는 마음은 마치 자신이 봉사 받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고, 당신 삶에 지배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될 것이다. 만약 이때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면, 당신은 자신이 지닌 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삶에서 당신이 목적을 찾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생각하는 마음의 본질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이곳에 온 목적을 이해하는 기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성적 이해 혹은 믿음과 연상에 의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실패와 실망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마음은 이 기반을 얻는 데 오직 큰 마음에 봉사할 수만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마음만으로는 이 기반을 제공할 수 없으며, 당신이 필요한 큰 이해, 큰 체험을 내줄 수 없다.


이 큰 이해와 체험이 있으면, 당신은 자유롭게 앎 자체에 의지할 수 있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배울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진정한 영성의 길이다. 세상 모든 종교가 이 근본적인 발견과 표현을 뒷받침하는 한, 그 종교들은 순수하다.


하지만 만약 영성에서 역사와 문화와 관습이 제거되고, 종교의 물질적 장신구가 모두 제거된다면, 남는 것은 영성의 본질이다. 큰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앎이라 부른다. 앎은 당신의 아는 능력을 통해 표현되며, 당신 자신 안에서나 관계의 맥락 속에서 깊은 깨달음을 통해 체험된다. 앎은 항상 세상에서 진정으로 생산적인 활동에 당신의 초점을 맞추고, 당신이 삶의 독특한 부름과 목적을 깨닫고 표현하고 성취하도록 당신을 한 계단 한 계단씩, 차례차례 이끈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큰 공동체 맥락 안에서 영성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 믿음과 전통, 의식, 문화는 오직 인류를 위한 것이다. 영성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심지어 지구에 있는 식물과 동물의 왕국까지 포함하여, 인류의 범주를 벗어나면 자신을 연결할 수 없다.


종교는 중요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영적 본성과 삶의 목적을 체험할 기회를 주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종교 역시, 생각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큰 현실에 봉사할 수만 있다. 종교만으로는 큰 현실이 아니다. 당신 내면에서, 큰 현실은 앎 안에서 표현되고 구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관념이나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는 것의 심오한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신과 당신의 관계, 모든 삶과 당신의 본질적 관계를 드러내고 확인한다.


그런데 앎은 당신을 위해 세상에서 특정 목적이 있다. 앎은 당신이 왜 세상에 왔는지 기억하고, 당신이 여기 오기 전에 영적 가족과 한 약속을 기억하며, 당신이 제공해야 하는 진정한 공헌을 제공하기 위해 물질적 삶에 다시 들어오고자 하는 당신의 소망을 기억한다.


앎은 잊지 않았지만, 당신은 잊었다.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려면, 즉 인간 사회에 들어와서 거기에서 활동할 수 있으려면, 잊어야 했으므로, 당신은 잊었다. 만약 어렸을 때, 고향과 큰 목적에 관한 기억이 당신 마음속에 온전히 자리잡았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고향에만 가고 싶을 것이다. 당신이 온 곳이자 결국 되돌아갈 곳인 태곳적 고향에만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곳에서 제대로 활동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올 때, 기억상실의 시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일단 세상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나면, 당신은 앎에 의지해야 하고, 앎을 찾으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큰 공동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 이렇게 하는 것이 큰 공동체 영성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 필수 요소인가?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체와의 접촉을 당신이 준비할 수 있게 하는 데 핵심인가?


우리가 말했듯이, 앎은 당신의 영성과 영적 본성의 본질이다. 또한, 우주에 있는 모든 지적 생명체의 영성과 영적 본성의 본질이기도 하다.


역사나 문화, 의식, 관습은 물론, 심지어 믿음이나 이상까지,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을지라도, 앎의 수준에서 보면, 당신들은 하나이다. 당신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신들은 존재에서 존재로, 본질에서 본질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당신들은 함께 인종과 문화, 정체성, 믿음, 연상 등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이것이 모든 지적 생명체와의 근본 연결고리이며, 모든 지적 생명체와 당신이 공유하는 큰 영성이다. 그래서 이것이 큰 공동체 영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앎은 당신이 지구 밖에서 온 지적 종족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는 데 핵심이고, 인류 자체의 상황 속에서도 핵심이다. 앎은 정신환경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당신의 유일한 부분이므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진실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당신의 생각이나 소망, 감정, 정서, 경향, 믿음 등은 모두 쉽게 영향을 받으며, 사실 오랜 세월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신에게 확신과 안정을 주려고 의지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당신이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생각들은 단순히 당신의 환경에서 받아들였으며, 조건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세상에 독창적인 생각은 거의 없다.


앎의 학생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자신의 조건화 정도를 충분히 수용하고, 이 조건화를 계속 강화하는 주된 요소와 영향력을 인식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한 문화 안에서 사회의 균일성을 만들어내지만, 개인에게 큰 구속, 즉 앎의 학생이 인식하고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구속도 만들어낸다.


앎을 발견하려면, 당신은 앎을 발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모두 인식해야 한다. 앎을 따르려면, 당신은 앎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들을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과거에 당신 생각을 지휘하고 조건화시킨 정신환경의 영향력과 계속해서 그렇게 하려는 영향력을 직접 대면하여 바라본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믿음이 대부분 당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이 대부분 당신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충동 중 상당수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오랜 세월 그것들에 노출되어 조건화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앎의 학생에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인간 상황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알아야 할 특정 목적이나 주목해야 할 것이 없다면, 텔레비전을 많이 보거나 신문을 많이 읽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중 매체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성이 거의 없이 모두가 비슷하거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기존 관념을 강화할 뿐이다. 이러한 조건화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게 형성되기도 한다. 이런 조건화는 큰 변동성 없이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정보를 줄 것이다.


그런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설득될 수 없다. 앎은 오직 다른 이의 앎과 창조주의 마음인 우주의 앎에만 반응한다. 앎은 설득당하거나 넘어가지 않으며, 물질환경과 정신환경 모두에서 삶에 발현된 그 어떤 것에도 혼란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앎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 안다. 앎은 거짓에 영향받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앎이 당신 내면의 큰 힘이고 큰 능력이다. 삶에 대한 앎의 이해는 개인적 관점이나 문화적 조건화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래서 앎은 세상에서 당신의 자유를 나타낸다.


앎에 가까이 다가가면, 당신은 앎의 자유, 앎의 능력, 앎의 결단력을 갖게 될 것이다. 큰 공동체 안에서 이것은 핵심 요소이다. 당신이 자유로워질지, 아니면 설득되어 궁극적으로 지배당할지에 대한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법을 배우면서, 당신은 사회적 조건화의 힘과 그 힘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큰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설득의 힘은 훨씬 더 강력하고 의식적으로 유도된다.


우리가 말했듯이, 이곳 지구에서 영향력과 권력을 얻고자 하는 모든 방문자는, 정신환경에서 인간의 믿음과 이상은 물론 심지어 인간의 종교까지 이용할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 두려워하는 모든 것, 믿는 모든 것, 무의식적으로 믿는 모든 것은 방문자들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고 지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이것이 정신환경의 기술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조작이지만, 그 조작의 징후는 매우 뚜렷하다.


당신이 읽은 것, 들은 것, 귀 기울인 것, 어떻게 사물을 보는지 배운 것, 이 모든 것은 삶에서 엄청나게 발현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 앎으로 강한 사람들이 거의 없으므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만약 선호나 심각한 불안감 없이,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인간의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할 것이고, 큰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인류가 왜 그처럼 대단히 취약한지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단순히 삶의 역학관계와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선과 악에 대한 당신의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방문자들은 악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단지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필요한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들은 앎에도 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분별력도 갖지 못한 채,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 활동을 수행하도록, 조건화되고 프로그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을 당신이 따르면, 당신은 인류에게 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제 단순히 영적 추구가 아니며, 생존과 자결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넘어, 어쩌면 당신은 인류에게 심지어 큰 공동체에서도 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복잡한 사회 발전과 풍부한 영적 유산을 감안할 때, 앎을 받아들이는 역량과 기회가 방문자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인류에게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앎으로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환경에서 자유로울 것이며 정신환경에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앎이 없다면, 이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쉽게 더 강력한 생각에 따라 흔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에서 당신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무리가 아닌 집단심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환경에서 집단심은 엄청나게 강력하다.


방문자들 모두 집단심을 연습하고 이것을 표출한다. 바로 여기에서 방문자들은 지구에서 인간들과의 모든 직접적인 만남에서 인간의 인식과 기억,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기술을 얻는다. 이것의 증거가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입증할 것이다.


만약 나중에 사람들이 그것을 긍정적인 체험 혹은 부정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방문자들이 있었을 때, 자신의 체험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당신은 그 체험을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안심하기 위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지를 결정할 수 없거나,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면, 또 큰 공동체에서 온 존재와 직접 교류할 때 자신의 내적 진실이나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면, 당신은 정신환경에서 압도당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계속되면, 당신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잃을 것이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당신이 앎의 기반을 쌓을 가능성은 점점 멀어진다. 당신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며, 단순히 방문자들의 집단심에서 나온 결과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방문자들은 지구에서 앎의 회복을 지지하지 않으므로, 당신의 참된 본성 그리고 당신을 위한 앎의 메시지와 목적을 찾으려는 당신의 시도를 방해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지구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이것은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고, 수십 년 동안 일어났으며, 점점 더 널리 퍼질 것이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이곳에 있고, 이미 그들은 영향력의 그물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향력은 지금 당신이 알고 있음 직한 것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그래서 앎의 필요성, 큰 공동체의 이해와 관점을 배울 필요성이 이 시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인류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류는 먼저, 정신환경 측면에서 전혀 강하지 않아, 심각하게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 강렬하고 긴급한 영적 부름이 있는 것이다. 이 부름은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더 긴급하다. 사람들은 어쩌면 "음, 이것은 단지 깨달음을 얻을 기회일 뿐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인류 자체의 온전함과 자결권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다.


설사 인류에게 심각한 환경적·사회적 문제들이 없다 하더라도,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은 세상에 긴급한 부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데 현재 자신들의 체험을 형성하고 있고 자신들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는 큰 세력들을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읽어보면, 여기에서도 당신은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정하는 큰 사회적·정치적 세력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잘 보여주었지만, 현재 상황은 전혀 다른 수준, 전혀 다른 차원에 이르렀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영적 부름인 앎의 부름은 세상에서 매우 강렬하고 긴박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신이 작은 개인적 위안이나 개인적 쾌락에 만족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것이 당신을 앞으로 내몰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당신을 짜증나게 할 수도 있으며, 그동안 구축해놓은 몇 가지 편안함에 쉽게 의존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을 나타내며,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긴급한 큰 부름을 나타낸다.


인류가 성공적으로 큰 공동체에 출현하여 그곳에서 자유를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고 인류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리에 서려면, 앎이 개별적으로나 집합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 계획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며, 교육 제도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용기와 내적 부름이 있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앎길을 따르고, 앎 안에서 강해지며,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올 것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항상 발견과 발명의 원천, 사회적 회복의 원천이었다. 또한, 종교에 영성의 본질을 불어넣어 항상 종교를 존속시키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요구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큰 전환점에 우리가 와 있다.


당신 내면의 앎은 인류가 큰 공동체 안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앎은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며,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동시에, 앎은 지금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중시하는지, 또 어떤 느낌에 있고 그 느낌에 무엇이 영향을 주는지 정확히 안다.


앎은 당신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당신이 하나가 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며, 당신이 앎의 큰 평정과 앎의 큰 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앎은 끈질기게 당신을 이 방향으로 데려갈 것이다. 쉴 틈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는 어떤 휴식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당신 존재의 탐색과 열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에서, 작은 무리에 속한 개개인들이 앎을 확립하고,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신이 지금 지구에서 직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보통 일어난다. 왜냐하면 고도로 통제되고 발전된 사회에서는 개인 안에서 앎이 출현하는 것을 큰 위협으로 보며, 종종 잔인하게 억압한다.


여기서 시민들의 마음과 태도, 우선순위는 정신환경과 사회적 조건화를 통해 고도로 통제된다. 그러므로 앎을 따르는 개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훨씬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들의 사회 상황과 정신환경에서 그들이 자유를 얻고 유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그런데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이 큰 공동체를 이해하고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된다. 앎으로 강해지고 세상에서의 큰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모든 개인은 엄청난 도움을 받을 것이며, 이 세계 안과 밖 모두에 있는 삶의 큰 연합에 마음을 열 것이다.


인간의 성장을 감독하는 것은 큰 영적 힘이다. 우리는 이들을 불가시 존재들이라고 부르며, 적어도 큰 공동체의 많은 문화권에서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정원사처럼, 그들은 인간의 지성과 영이 성장하는 것을 감독하며, 마찬가지로 지적 생명체가 머무는 모든 세계에서도 지성과 영을 감독한다.


여기서 인간 사회는 대단한 풍요로움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다. 여기서 개인들이 앎에 응답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류의 방향 자체에 영향을 주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수가 너무 적고, 그들의 체험과 성장이 인간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과 대단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들로서 돋보이지만, 극도의 역경이나 박해, 오해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숨어지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불가시 존재들과 연합인 큰 영적 연합이 있으며, 그 연합은 그들이 진보하고 발전할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당신은 큰 공동체에서 인류의 진정한 동행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왜 그 동행자들이 인간의 성장과 인간의 온전성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는다. 큰 공동체에서 진정한 동행자들은 앎의 공동체를 대표한다. 그들은 대단한 군사 세력이나 정치 세력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큰 공동체에서 숨어지낸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불가시 존재들을 통해 당신들과 소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들이 앎길에서 진보함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큰 영적 연합이자 조직이기 때문이다.


물질계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크고 복잡한 발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물리적 영역을 넘어서까지 확장되는 거대한 통신망이 이면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여기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앎의 수준이므로, 앎을 표출하고 앎을 반영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세력도 그곳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 환경이 아니다. 정신환경은 심리 환경이지만, 앎의 환경은 같은 방식의 심리 환경이 아니다.


여기서 당신은 큰 공동체에 동행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구에서 앎이 회복되는 것을 지지하며, 마치 당신이 불가시 존재들과 연결되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그들은 불가시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전 우주에서 앎을 강화하기를 바라며, 큰 공동체 안에 있는 복잡한 정신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앎이 계속 살아있기를 바란다. 삶에서 그들의 임무는 앎을 표현하고 드러내며, 그들 각자의 세계와 큰 공동체 전역에서 개개인의 마음과 가슴 속에 앎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그들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이들이 당신의 가장 큰 동행자들을 대표하고, 당신의 가장 강력한 관계를 대표한다. 당신이 앎길에서 전진할 때만, 또 깨달음의 큰 문턱을 통과할 때만, 당신은 비로소 그 동행자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그들 의도의 힘과 그들 뜻의 정중함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인류가 큰 공동체에서 전혀 기회가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고,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 굉장히 압도적으로 여겨질 것이며, 이것은 당신을 좌절시킬 것이다. 하지만, 낙담하지 말라. 왜냐하면 큰 공동체 전체에 존재하는 창조주의 힘, 불가시 존재들의 힘, 앎의 큰 공동체의 힘이 당신과 함께 머물기 때문이며, 당신이 사회적 조건화를 극복하고 정신환경에서 자유를 얻고 앎길을 찾는 등의 이 어려운 과제에서 그 힘들이 당신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용기를 내라. 왜냐하면 지금 세상에는 창조주의 뜻으로 이곳에 온 큰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이 자유를 찾을 수 있고 세상에 봉사하는 데, 그 자유를 건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려는 당신의 진정한 동행자들의 열망과 의지를 나타낸다.


큰 공동체 앎길이라고 불리는 큰 가르침이 인류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 목적은 큰 공동체에 인류를 준비시키며, 또 앎길을 배우고 따르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가르침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 가르침은 앎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독특한 공부 방법을 제공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내면에서 큰 부름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우리가 앎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영적 회복의 기반을 마련하며, 큰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를 얻는 기반을 마련한다. 또한, 당신이 다른 이들과 진실하고 목적 있는 관계를 인식하고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을 수 있게 해주며, 앎의 현실과 체험을 일상생활에, 세상에서 당신이 활동하는 모든 측면에, 가져다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을 자신의 진짜 힘과 능력에 결합시킴으로써, 또 자유를 위한 기반을 제공하고, 당신이 지금 한 종족으로서 출현하는 큰 정신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지적 상호작용의 역동성을 가르쳐줌으로써, 당신을 큰 공동체에 준비시킨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의 운명에 반응하고, 당신의 운명을 강조하며, 당신의 진정한 영적 본성에 반응하고, 당신의 진정한 영적 본성을 강조한다. 이 가르침은 한 사람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 한 사람의 교육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르침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개인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큰 도움을 받고 있으므로, 용기를 내라. 준비 방법이 당신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 바로 그것을 당신이 이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에 준비 방법이 있다는 것과 그 현실에 대한 증거이다.


당신이 앎길에서 나아가고 전진할 때, 불가시 존재들이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을 안내하고 축복하고 있으니, 용기를 내라.


큰 어려움과 희생을 통해, 앎의 현실을 정착시키고 자신의 세계에서 앎길을 발전시킨 강한 동행자들이 큰 공동체에 있으니, 용기를 내라. 그들의 성취는 당신이 큰 공동체 앎길을 공부함으로써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인식과 그들 영의 위대함은, 당신이 앎의 수준에서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삶에서 일어나는 이 큰 영적 파노라마에 들어갈 때,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여기서 환상적인 믿음이나 복잡한 형이상학적 믿음 체계 없이, 높은 이상이나 비현실적인 연상 없이, 들어간다. 당신은 오히려 순수한 정신, 하나된 마음으로 들어간다. 이 상태가 되는 것만으로 누구든, 큰 공동체 그 어디에 있는 존재이든,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삶의 이 큰 연합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큰 공동체 준비는 영적 준비이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 힘과 지성을 회복하는 데 기본 준비이다. 그 준비는 앎길을 따르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음으로써 표현된다. 여기서 당신은, 그 준비가 제 기능을 다하고 일상생활의 물리적 현실과 큰 공동체의 현실에서 존속될 때, 종교의 한계를 초월하며, 영성의 큰 파노라마 속으로 들어간다.


- 신의 새메시지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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