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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신성 깨달아 깨달음 빛이 비치면 마음의 무지와 그림자가 사라진다,깨달은 자는 마음(의식,업,죄)이 소멸되어서 더 이상 인간 몸으로 태어나

빛몸 2020. 1. 28. 21:12



<<*깨달은 자는 종교 교주나 거지나 개등 동물을 내면 신성 가진 존재로 평등하게 여기고 대한다

   *신성 깨달으면 ,내면 신성의 즐거움,평안한 쉼,신성의 빛 상태를 누리며 영원한 평안에

      도달한다,

     ㅡ 참된 자유에 이르고 해탈(마음 넘어 초월한 것)한다

   *눈감고 숨을 자연스레 깊이 쉬며 내면 생각 흐름 지켜보아 마음 생각을 넘어 자기 신성에

     이르라(본인 글 5월 24일지 ,,생각 사이 공간,생각 쉬는 명상법 2항목 참조)

   * 신성 깨달으면 자기 내면 신성의 빛이 <마음의 에고><마음 에너지 덩어리인 업,죄>를

         비춰 마음의 어둠을 녹여 소멸 해소한다

   *깨달은 자는 신성 상태에 머물러 존재만 함으로서도

      세상에 평화를 주고 영의 빛을 세상과 모든 인간에 방사하여 세상을 도운다

      각 인간의 깨어남이 세상의 평화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다

   * 깨달은 자는 우주의 주인이 되며 신 자체다

       깨달은 자는 신성(신,영)의 빛에 안주하며 신성의 빛을 우주와 세상에 발산한다

        신성(영)의 빛이 근본이되어 우주 만물이 창조되며, 인간 몸 마음도 영의 빛에서

           시작되고, 몸 마음 바탕이 자기 신성이고 신성 본체인 신이다

           ***본인 정리 글임   >>

 

 

 

12. 행위의 요가로 마음을 제어한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궁극의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마음이 제어되지 않은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으로써

자기가 하는 행동에 얽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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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아홉개의 문이 있는 도시'인 육체 안에서 평안하게 거한다.

그는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종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이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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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참자아 주인공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충동이나,

행위나,

행위와 결과의 연결은

참자아 주인공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자연적인 본성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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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만물의 주(主)인 참자아 주인공은

어떤 사람의 선행이나 악행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행위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와도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자기가 행위의 주체로서

선이나 악을 행하고

그 결과로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믿으며

미혹의 늪에서 헤메는 이유는

참지혜가 무지의 장막으로 덮혀 있기 때문이다.

 

16. 무지의 장막은

자기 내면에 거하는 참자아를 깨달을 때 사라진다.

태양처럼 빛나는 이 깨달음의 빛이 비치면

자신의 지고한 신성(神性)인 부라흐만이 밝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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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참자아 주인공의 자리를 궁극의 안식처로 여기고

그 자리를 깨닫고

그자리에 도달하여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안주하는 사람은

그 지혜로 모든 허물이 씻긴다.

그런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는 개체적인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로 환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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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참자아 주인공을 깨달은 사람은

만물을 평등하게 본다.

그는 지식과 예절을 다 갖춘 종교 지도자나

천한 사람이나

코기리나 소나 개를 볼 때

겉모양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참자아를 본다.

 

19. 이렇게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사람은

이생에서 더 이룰 것이 없다.

그의 마음이 이미

완전하고 흠이 없는 부라흐만 안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20. 이런 사람은 모든 망상에서 벗어난다.

좋은 것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나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마음이 참자아인 브라흐만 안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 브라흐만에 안주하는 사람은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참자아를 깨닫는 깨달음의 기쁨만을 추구하며,

의식을 브라흐만과 통합시키는 요가명상을 통해

불멸의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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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르주나여,

외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은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게 한계가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다.

 

23. 현명한 사람은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육체에서 비롯되는 욕망과 분노의 충동을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이며

온전한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24. 이런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즐거움과 평안한 쉼과 깨달음의 빛을 발견하며,

브라흐만과 하나 되어

브라흐만 안에서 영원한 평화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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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지혜로 모든 의심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에게 죄와 허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26. 마음을 제어하여 참자아에 안주하며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브라흐만 안에서 영원한 평화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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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지혜로운 사람은

참자아를 깨닫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그들은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눈을 감고,

들이 쉬고 내쉬는 숨을 고르게 하며,

두 눈썹 사이에 있는 영적인 의식 쎈터에 집중하는 명상을 통해

감각과 마음과 지성의 활동을 제어한다.

 

28. 그렇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욕망과 두려움과 분노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에 이른다.

이것이 해탈이다.

 

29. 해탈한 사람은 나를 만물의 친구로,

우주의 주(主)로,

모든 제사와 영적인 수행의 목적으로 알며

영원한 평화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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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마음이란 에고적인 개인의식을 말하며, 이 에고의식은 끝없이 변화하는 활동적인 파동의식이다. 이 변화무쌍한 파동의식은 지금현재라는 의식의 중심점에서 항상 멀리 떨어져서, 중심점 주변에서 맴돌면서 진동하는 파동의식이다.

 

이 파동의식은 마음 속에서 흘러 다니는 생각들이며, 그 생각들은 시간적인 파동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서, 항상 현재점에 머물지 못하고, 시간요소적인 결과만 추구하는 것이다.

 

즉 시간적인 인과(원인과 결과)관계만을 집착하므로서, 자기가 행위하는 것(과거)에 대한 결과(미래)만을 추구하므로 항상 지금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 뿐이다.

 

따라서 마음을 고요하게 수행한 사람은 이러한 움직이는 파동의식을 잠재우고 지금현재에서 조용하게 안주함으로써 자연히 수행의 결과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시간적인 파동요소로 구성된 생각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은 그마음이 항상 어떤 대상이나 결과에 집착함으로써, 그생각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 그 생각에 따른 행동에 스스로 얽매이게 된다.

 

*13. 아홉개의 문이 있는 도시란 눈구멍2, 귓구멍2, 입구멍1,콧구멍2, 똥꼬1,쉬1-즉 육체를 말한다.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포기한 사람(내가 있다는 현존감에 안주한 사람)은 감각기관인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감각기관에 끄달리지 않고 평안하게 안주한다.

그는 에고에서 벗어나 행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14. 참나는 동적의식파동의 움직임인 행위의 움직임과는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동적의식파동은 참나에서 나온 의식빛에 의한 그림자이지만, 그 그림자는 참나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타난 음과 양, 상승,하강,조화, 지수화풍공 등의 기체,액체,고체.에너지, 분자,원자,광자 ,미립자 등의 자연적인 파동의 기본성질에 의해서 서로간에 상쇄 간섭작용으로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적파동의식의 그림자들은 실제로 나타나서 작용한다기 보다는 육체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식의 근원인 참자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참자아는 이런 움직임과는 뚝 떨어져 있으므로 행위들의 주체는 아니다.

 

*15-16. 참자아는 삼라만상의 근원이지만 어떤 행위(동적파동 움직임)와도 관련이 없다.

자기가 어떤 행위의 주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나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이며,

이러한 무지는 참나가 무엇인가를 알때에 사라진다.

참나에서 나오는 빛이 그러한 에고와 동적의식들을 전부 녹여 버린다.

 

* 17. 참나 속에 도달하면 더 이상 동적의식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에고의 습들이 녹아 버린다. 그리고 더 이상 에고로 환생하지 않는다(고한다)

 

*18-21

참나가 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참나로 보고,모든 만물을 참나로 본다.

모든 개체와 모양들은 의식의 그림자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은 이제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상대성이 없어지고, 너와나, 이것과 저것, 나와 세상이 모두 하나의 의식 덩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참자아의 빛속에서 해탈의 환희를 즐기기만 한다.

그는 주시자(존재의식)을 참앎(참나)의 빛속에 녹이는 명상을 통해 완전 일원화의 공진상태인 삼매를 즐긴다.

 

* 22-24.

외적인 대상과의 접촉 즐거움은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감각파동의식으로 생겨서 유지할 때는, 그대상에 집착했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면 습에 의하여 미련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한계 때문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일으켜서 고통의 원인이 된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현명한 사람은 그런 잠시동안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수행을 진지하게 하다보면 육체의 욕망이나 마음의 충동 등은 저절로 극복 될 수가 있다.

이렇게 자기극복을 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내면에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또다른 진정한 지복감을 얻을 수가 있다.

 

이러한 내면의 지복감을 한번 맛 본 사람은 외부대상과의 접촉에 의한 즐거움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가를 잘 알게 된다.

그 내면의 빛은 영원한 지복의 빛이며 평안의 안주처다.

 

* 25-26.

이러한 참나를 아는 지혜로써 에고의식의 허황함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자신은 어떠한 행위에도 관계가 없으며, 죄와 벌도 없고 선악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참나에 안주해 있으면, 침묵 속에 있으면서도

이세상의 유정,무정을 통틀어서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세상에 영원한 평화의 복음을 자연스럽게 펼치게 된다.

 

*27-29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참나 깨달음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써 향한다.

그들은 의식의 촛점을 내면 깊이 향하고

눈을 반만 감고, 호흡의 주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두 눈썹사이 영안이나, 뒤통수쪽에 주의를 집중하여

감각과 마음의 움직임과 의식의 흐름을 통제한다.

 

그리고 의식의 앎 너머 무한하게 개방되어 있는 내면의식 속 미지의 깜깜한 空(玄牝)을 주시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끊임없이 수행하면 점점 마음이 고요해지며,

욕망이나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부터 벗어나는 곳에 이르게 된다.

즉, 의식의 움직임 흐름이 없는 순수존재의식에 이르게 된다.

 

순수존재의식에 이르면 자신의 우주적인 존재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의식의 근원인 참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대자유인이 되고,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해탈이란 자기의 에고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해탈한 대자유인은 세상만물과 하나이며,

또한 이 우주삼라만상의 주체자이며, 신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적 숭배와 기도와 제사의 기본목적이며,

그리고 정신수행의 목표라는 것을 알게되며

여기서 영원한 평안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