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을 통한 승 리
궁극에는 어떤 목소리도 언어도 없다.
누구나 그것을 듣지 않고 듣는다.
그대가 침묵하게 되어야
아무것도 그대안에서 꿈틀거리지 않는다.
그러면 듣지 않고도 그것이 들릴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그러나 그대가 진리에 다가갈수록
그 경험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이 모순된 역설과의 조우를 각오하라.
그리고 제자가 마주치는 첫번째 역설은
항복을 통한 승리이다.
그것이 첫번째 조우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떻게 제자의 본성에
첫발을 내딛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스터에게 굴복한다.
그리고 이 보기드문 아름다움은 복종하는 것에서
그대는 처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그대는 마스터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노예가 되는 것으로서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의 마스터가 된다.
그리고 그대는 마스터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도(道)에는 역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프리즈나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프리즈나는 궁극의 이해를 의미한다.
······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것을 모르면서 안다.
만약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것을 불완전하게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나는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라는 것이 거기에 있어서
그대의 현존이 방해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훼방꾼이다. 그대가 장애물이다.
아무리 그대의 에고가 미묘하더라도,
아무리 그대의 에고가 투명해지더라도,
여전히 그것이 장애물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완전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 에고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그때 그대의 시야는 자유롭다.
그 때 거기에는 어떤 장애물도, 방해자도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그것(진리, 달마카야, 신)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붓다 이전의 우파니샤드(Upanishads)에서는 말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가 아는 것이다."
붓다이후에도 소크라테스는 같은 것을 말한다.
"나는 오직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이 한가
지만을 안다."
이것이 진리에의 접근방식이다.
그대는 계속하여 녹아버리고 있다.
그대는 너무나 용해되어 어떤 지식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 때,
그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거울은 '나는 당신을 비추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단순히 그대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거울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식 또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요구는 에고로부터 온다.
만약 누구라도 이를 모른다면,
그는 참으로 알고 있는 자가 아니다.
만약 누구라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얻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항복을 통한 승리이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것이 참된 포기이자 기쁨이다.
그리고 궁극의 역설은 그 포기와 기쁨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부활하고자 한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
만약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올바름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하고 느끼는 것은,
단지 그대가 아직도 올바르고 특별한
어떤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덕이 있는 참된 사람은 절대로 그의 덕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의 미덕은 자연스럽다.
마치 그대가 숨쉬고, 피가 순환하고,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는 고결한 것이다.
참으로 고결한 것이다.
참으로 고결한 사람은 미덕에 대하여 옳고 그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옳고 그름을 초월할 때, 그의 덕은 완성된다. 그러한 지혜는 지고한 지혜의 수많은 문을 여는 열쇠이다.
달마대사는 말한다.
모든 붓다는 텅비어 있음을 설법한다.
왜 ? 왜냐하면 그들은 탐구자의
굳어진 관념들이 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탐구자가 텅비어 있음의 관념에 매달린다면
그는 모든 붓다를 배반하는 격이 된다.
어떤 이는 삶이라는 것이 없을지라도 삶에 매달린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을지라도 죽음에 매달린다.
진실을 말하자면 태어날 것도 죽어야 할 것도 없다.
- 오쇼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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