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상처에 대한 탐구
우리는 에고에 기초한 의식에서 가슴에 기초한 의식으로 전환해가는 과정을 4개의 단계들로 구분했습니다.
1. 에고에 기초한 의식에 만족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다른 뭔가를 갈망하게 되는 단계 : 종말의 시
작
2. 에고에 기초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수반되는 감정과 생각들을 인정하
고, 해소하는 단계 : 종말의 중간
3. 내면에 존재하는 에고에 기초한 낡은 에너지들을 죽게 하고, 고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가
되는 단계 : 종말의 끝
4. 사랑과 자유의 발로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가슴에 기초한 의식을 일깨우는 단계 : 타인들도 변
형될 수 있도록 도움
이 장에서는 두 번째의 단계를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에고와 동일시하지 않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은 본질적으로 난해하고, 아주 철학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느끼고, 생각하도록 가르쳤던 것과는 반대로, 여러분이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들이 여러분의 현실로 갑자기 다가오게 되며, 여러분이 행하는 삶의 선택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이게 나야?,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것도 더 이상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선택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며, 한 걸음 더 깊이, 더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더 깊은 부분들, 즉 가정교육(upbringing) 및 사회를 통해 별로 길들여지지 않은 부분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참모습, 즉 독특함과 개체성을 살짝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즉 부모, 직장, 인간관계, 심지어 자신의 육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부분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시기는 여러분이 자신의 신성, 즉 어디에도 전혀 매어 있지 않은, 여러분의 영원한 일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될 때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다차원적인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다른 여러 현실세계들에 동시에 나타낼 수가 있으며,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직선적인 시간의 틀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개성은 다차원적인 존재인 여러분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 현재의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단지 여러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의 측면을 뛰어넘어, 참된 여러분의 더 큰 자아와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받은 부분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에고의 지시와 요구에 맞춰 살아가게 됨으로써, 여러분의 내면에는 심리적인 상처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첫 단계가 끝난 후, 여러분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내적인 상처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치유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대해 이제 설명하고자 합니다.
에고가 지배하게 되면서, 여러분의 행동과 사고들은 오랫동안 두려움에 그 토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권력과 인정(認定) 그리고 통제를 얻으려는 욕망을 무자비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이 점에 있어, 여러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숨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자신의 참된 욕구가 아니라, 외적인 기준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통제하거나, 지배하려는 욕구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말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의식 상태로 인해, 여러분의 영혼은 온전함에 상처를 입게 되었으며, 에고의 지배하에서, 영혼은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에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여러분은 이러한 내적인 고통을 더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가면을 벗은 채, 고통은 있는 그대로 여러분에게 노출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분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여러분은 자신의 내적인 상처들을 평가하는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처들로 인해, 부정적인 행동 패턴들, 즉 중독, 우울증, 시시각각으로 기분이 바뀌고, 의사소통에서의 문제, 친밀한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이제 막 빛을 향하기 시작한 영혼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게 됩니다. 영혼이 권력과 통제를 얻으려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더 예민해져 가는 그때, 자기-심판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고와 가슴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들은 더 사랑스러운 현실을 찾고 있지만, 이들은 아직도 에고의 영향력 범위 내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특성들”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내적인 상처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상처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 때문이며, 이로 인해 부정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마음자세로 살펴본다면, 중독되고, 우울하며, 실패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내적인 고통만을 보게 되며, 이러한 고통을 가능한 최대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으로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에고에서 가슴으로 변형되는 두 번째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여러분이 자신의 내적인 고통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근원을 이해하고, 허용하세요.
에고 중심의 의식이 표현하는 모든 것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의 핵심을 인지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가슴에 기초한 의식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비난받을 만한 짓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자기-보호의 본능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부정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영혼과 접촉할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영혼을 인지하자마자, 여러분은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싫어하는 것, 즉 여러분을 짜증 나게 하고, 오래전에 없애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이 불안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게으름, 참을성이 없는 것, 혹은 중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느끼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특성 혹은 성향 뒤에 감춰져 있는 진정한 동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이러한 것을 반복적으로 느끼거나, 행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동기 속에 감춰져 있는 두려움의 요소를 인식할 수 있나요?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여러분은 속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아, 저런, 나는 네가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몰랐어! 내가 도와줄게.”라고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여러분의 태도에 인내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도 생기게 됩니다.
공격성, 중독, 복종, 허영심 등과 같이 두려움에 기초한 행동을 “나쁘고”, “죄가 되며”, 혹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는 한, 여러분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그 자체는 두려움에 기초한 행위입니다. 판단하게 될 때, 여러분의 내면은 황폐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입술을 다물고, 눈매가 냉랭해지는 것처럼, 뭔가가 조여들게 됩니다. 왜 우리는 매사를 판단하려고 할까요? 매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것으로 좁혀가려는 이러한 충동이 무엇일까요? 판단하려는 욕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두려움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둠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에고에 기초한 의식을 버릴 때, 여러분은 매사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계발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라보는 방법을 중립적이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할 수가 있으며, 중립적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것에 주목은 하되, 매사가 어떤 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에고에 기초한 행위가 가져올 원인과 결과를 지켜보고, 그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핵심을 이해함으로써, 여러분은 에고를 정말로 쉽게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느끼게 되는 어둠과 고독감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노골적으로 보이게 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도와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폭력과 무자비함이라는 가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이게 되면, 그러한 두려움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동이 파괴적이고, 잔인할수록,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두려움과 고독감은 인식하기가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고독감에 대해 자신이 겪은 밑바닥으로부터의 체험을 통해, 여러분은 살인자들, 강간범들 그리고 죄인들의 영혼 속에 지니고 있는 깊은 두려움과 접촉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행위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둠에 대해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에 기초하여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두려움을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판단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은 순리에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두려움을 존재하는 힘으로 정말로 이해하고, 살아 있는 체험을 통해 철저하게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판단마저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은 좋은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닙니다. 두려움은 단지 존재하는(IS) 것일 뿐이며, 해야 할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념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두려움은 심한 고통이면서, 또한 축복입니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이 여러분의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던 선택은 여러분을 위해 했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들(Gods)이었으며, 말하자면, 두려움이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만 기초하고 있는 세상보다, 보다 더 물질적이고, 더 충만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이 믿을 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창조계를 살아 있게 하는 요소입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곳에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찾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감정의 전(全) 범위를 탐구할 수가 있으며, 심지어 사랑의 부재(不在)를 통해서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부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존재는 오로지 두려움이라는 배경이 있어야만, 느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모든 곳에 스며들게 됨으로써,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창조함으로써, 그리고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랑이라는 바다 밖으로 내던져짐으로써, 여러분은 처음으로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가 되나요?
[출처] 에고에서 가슴으로 II (1/2) |작성자 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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