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트 쿠마라 대사님

사나트 쿠마라 - 당신의 현존을 공유하는 14번째 광선

빛몸 2021. 2. 16. 16:33



당신의 현존을 공유하는 14번째 광선

https://blog.naver.com/hyperion11/220801306693 



 

나는 사나트 쿠마라의 현존입니다. 앞선 체제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이번에 활동하는 학생들 가운데도 내 이름을 대면 좀 우월한 지위를 연상하며 다른 상승 마스터들에 비교해, 나를 어느 정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보면 다소 재미있군요. 이 메신저는 루르드(Lourdes.프랑스 서남부 도시)에서 내 이름을 듣고 놀라운 반응을 나타냈어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솔직히 말하면 나도 놀랐어요. 우리 모두는 상승한 영역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영적 계층구조(hierarchy)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계급은 없어요. 거기엔 다른 존재들보다 더 우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가치 판단하는 그런 감각이 없어요.


진실로, 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누구이기 때문일까요? 나는 우주의 분쟁 조정자입니다. 나는 가장 낮은 구체들에 기꺼이 내려가 몇 가지 가능한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장 높은 직책은 아니어요. 어떻게 보면 우주의 수리공(renovation worker)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 시간으로 따져서 아주 먼 옛날부터, 내가 해왔던 일들을 루시퍼처럼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꺼려했던 존재들이 하늘에는 확실히 있어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가장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23:11)는 말이 나온 것이죠.

 

 

 

자격을 초월하여 가기

Going beyond status

 

자격을 찾고 지위를 구하던 존재가 그것을 초월하는 시점이 옵니다. 세인트 저메인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영적인 여정에서 앞선 행위나 지혜로 어떤 궁극적인 자격을 성취하여야, 왕국의 입장이 보장된다는 환영을 초월하게 되죠. 왕국은 이원성을 초월한 존재들에게만 열립니다. 여러분이 이원성을 초월할 때, 가치를 판단하거나 어떤 자격을 논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여러분에게 14번째 광선을 나타내려고 왔어요. 이 광선은 선형적인 마음으로는 극히 헤아리기 어렵고, 에고로는 추측조차 불가능합니다.

 

우린 물론, 이런 말을 사용한 형식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광선을 사실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나누는 '당신의 현존을 공유하기'라는 말로 숙고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내가 지구에 왔을 때, 당시의 지구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문명이랄 게 없는 아주 낮은 수준이었어요. 의사소통하는 수단도 없었고요. 인간이 잠재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세련된 원숭이들처럼 살고 있는 존재들만 있었어요. 그런 그들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요?

 

유대교를 혁신하려던 예수처럼, 힌두교를 쇄신하려던 붓다처럼, 당시엔 결부시킬 만한 종교가 없었어요. 절대적으로 뭔가 결부시킬 만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어떤 영적인 가르침을 줄만한 토대도 없었고, 심지어는 신이나 어떤 우월한 존재, 절대자처럼 삶의 영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도 없는 존재들에게 당신이라면 무슨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나는 나의 현존을 공유할 수 있었어요. 그 존재들의 현재의 의식 상태를 초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그 존재들이 받아들이도록, 내가 체험한 나의 신성한 현존을 공유했어요.

 

 

 

뭔가를 한다는 덫

The trap of doing

 

그대들이 다른 광선들의 입문들을 통과하는 영적 여정을 오르면서 더 높은 이해와 더 깊은 지혜를 성취해가죠. 그렇지만, 이러한 이해는 당신의 목에 다는 맷돌(millstone)이 될 수도 있어요. 당신은 '인류를 깨우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왕국이나 세인트 저메인의 황금시대를 구현하고자, 바깥으로 나가 뭔가 고상한 가르침을 줘야한다고 여긴다면, 부담을 갖기도 하고, 마음에 장벽을 만들기도 하지요. 가르침이 점점 더 고상해지면 더 높은 스승이 된다는 것은 흔한 오해가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시대에 있든 오늘날에 있든 마찬가지로 정확히 실재(reality)는 있지요. 사람들이 그 신성한 현존을 체험하게 만들 진정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든, 세인트 저메인이든 간에 인류에게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공유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물을 줄 만한 게 없어요.

 

그렇지만 자주 일어나는 문제는 에고라기보다는 선형적인 마음이에요. 더 높은 수준에 이르면, 에고(장벽)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의식적 자아는 사실 아직 선형적인 마음을 초월하지 못해요. 밖으로 나가 특정한 구루를 따르든가 특정한 조직을 만들어 특정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개조하고 특정한 말을 가지고 특정한 설교를 하는 등의 외적인 가르침을 해야 한다는 선형적인 마음에 당신은 집착하죠.

 

세계 곳곳엔 영적인 성숙도를 성취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가장 높은 진리를 특정한 표현으로 설교해야한다는 사고의 함정에 아직 빠져있어요. 붓다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면에서 그들은 '지금 현존함'의 중요성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집착하죠. 분리된 자아가 아닌 신성한 자아로서, 신성한 현존으로서의 자신을 잊죠.

 

사랑하는 이들이여, 확실히 선형적인 마음은 사기꾼과 거짓말, 거짓교사들과 환전상들에 도전하면서 예수가 말했던 것을 수단으로 가져와 "당신도 그들의 거짓을 보고 그 거짓과 반대인 진실을 말로서 가르치고 대응해야한다"고 하죠. 그렇지만 우리가 말했듯, 말은 말일 뿐입니다. 말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말로는 절대적인 ​​진실을 표현할 수 없어요.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세요. 언어를 통해서는 절대적인 진실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어떤 말도 방해가 될 수 있어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열 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면, 그들에게 열 가지 다른 체험이 될 것입니다.

 

 

 

직관적 체험이 필요하다

The need for gnosis

 

그래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는 자(the knower)와 알려지는 것(the known)이 하나가 되는 직관적 체험(gnosis)이 필요합니다. 만일 내가 표현하는 것을 확실히 알길 원한다면, 당신은 언어를 초월하여 나의 현존에 조율해야 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다른 사람이 완전히 알 수 있게 이해시키려면, 언어나 가르침이나 기술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공유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말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말은 선형적인 마음에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언어는 당신의 신성한 현존에 의해 영향 받아야 합니다. 더 높은 존재 안에서의 당신이, 더 낮은 형태를 통해서 비추는 당신으로, 그래서 그들의 가슴 내면과 희미한 추억을 깊이 휘저어 이 세상을 초월한 어딘가에서 그들 또한 왔음을 기억하게 해야합니다. 이 세상을 초월한 당신의 현존을 공유하면서, 체험하게 됨으로써 그들 또한 이 세상보다 더한 존재라는 기억을 일깨우는데 자극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선형적인 마음을 가지고, 혹은 에고나 에고의 판단에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나 더 수준 낮은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나,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저 도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이 가진 상대적인 진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가지고, 또 하나의 상대적인 진실을 얻으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이원적 투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보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신성한 현존과 함께 진실을 합친다면, 다른 이들을 깨울 수 있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을 이원적 투쟁에서 끌어올리는 대안으로서 우월한 한 가지 진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나의 실례로부터 배우세요. 누가 준비된 사람이고, 누구는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누구는 가치가 있고 없고를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의 진실을 공유하기 전에 누굴 만날지 기준이나 상황을 설정하지 마세요.

어떤 교양이나 영적인 가르침에 일시적으로 준비가 안 되었거나, 어떤 의식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일시적이든, 긴 시간이든, 무슨 의식 상태에 있든 상관없이 그들은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공유하는 데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대의 현존을 공유함이 전혀 낭비가 아니다

Sharing your Presence is never wasted

 

이것이 낭비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절대로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영적인지 아닌지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서 나오지요? 그것은 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반-영적인 사람들에 의해 당신의 수많은 생애 동안 거절당했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거짓교사들과 그들의 학생들에게 거절당할까봐 두려워, 당신의 감정을 뒤틀었고, 당신의 인식을 왜곡하도록 허용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입을 열기 전에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질까' 두려워 그들이 준비되어있는지 늘 평가하죠. 그렇다고 내가 '아무런 평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한 사람이 어떤 고상한 영적인 가르침에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 가르침이 주어져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당신의 신성한 현존의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한잔의 시원한 생명수를 그에게 대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거절하고, 누군가는 비난이나 판단을 할지 모르죠. 당신의 현존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승리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 상승하지 못했습니다. 상승에 더 다가갈수록 육신을 입은 누군가가 신성한 현존의 빛을 위한 열린 문이 되어, 외부의 형태를 통해 이 세상 속으로 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가는 그 사실로,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화됩니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 더 밝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빛이 조금씩 들어있는 많은 잔(cup)들이 더 위대한 변화를 만듭니다.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나눈다고 아무것도 낭비되는 것은 없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을 많이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로 사람들이 어둠속에 머물게 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신이 빛을 위한 열린 문이 될 권리를 가지면 결국 집단의식을 포함하여 모두를 밝혀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전에 감추어진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의식을 변화시켜 더 나은 선택들과 깨어있는 선택들을 할 수 있지요.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

A tool for stilling the mind

 

 

여기서 사나트 쿠마라께서 하나의 명상법을 말씀하고 있는데, "분별하지 않으면 즉시 본래부터 밝았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는 성담스님 말씀과 통하는 바가 많다고 느낀다.

 

- 밀로마세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어두운 생각을 극복하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성담스님

어둠이 일어나는 원인은 분별에 있습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즉시 본래부터 밝았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밀로마세

어둠이 정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환상입니까.

성담스님

어둠은 환상이지만,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분별을 하더라도 밝은 쪽으로 분별한다면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밝은 방향으로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높은 봉사를 진정으로 주길 원한다면 / 14번째 광선을 기꺼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 숙고해 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해야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요? 글쎄요, 세인트 저메인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기꺼이 가져야 합니다.


심지어 몹시 고단한 영적인 여정을 통해 성취한 그 가르침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 진실이라거나 고상 하거나 훨씬 더 낫다고 느낄 지라도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심지어 가장 높은 가르침이라도 모든 문제의 해법은 아니고, 모든 인류를 위해 적절한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모든 인류를 자동적으로 깨우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인류를 자극할 수 있는 봉사의 요소는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신중히 고려해 보세요. 여러분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었어요. 당신의 신성한 현존을 나눌 준비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받아들여 거듭나도록 한다면, 이미준비가 된 것이죠.

 

선형적인 마음으로 언제나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대신, 신성한 현존에 조율함으로써 이것을 더 의식적으로 깨달으려고 할 수는 있겠죠.

 

 

이제, 붓다의 요청을 따라 내면으로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하세요. 그렇게 단순하지만, 그 고요함을 체험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당신에게 줄게요.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은 이것에 접근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매일 혹은 최소한 가능한 자주, 시간을 가지세요.

 

조용한 방에 들어가세요. 척추를 곧게 세우고, 편한 의자에 앉으세요. 그러고 나서 내면으로 바로 집중하세요. 불가피하게 생각들이 계속해서 올라올 겁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위해 생각과 싸워야 한다거나 과거의 생각에 집착해서 그 생각의 덫에 빠지지 마세요. 생각의 덫에 빠지면 마음에 중압감이 듭니다. 더 힘들어지는 그런 압박에서 어떻게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명상을 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은 마음의 싸움과 혼란을 가중시키죠. 다른 쉬운 접근법이 있어요. 모든 표면적인 모습의 밑바닥에는 깊은 실재인 핵심이 있어요.

당신이 당신의 육신을 본다면, 눈에 보이는 피부를 벗어나 장기들과 뼈가 있음을 알죠. 그러나 뼈와 장기들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죠. 세포들은 분자들로 만들어졌고요. 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 졌어요. 원자들은 중심을 도는 전자궤도로 태양계 시스템의 미니어처 같아요. 그렇지만 전자들과 그 원자핵 사이는 비어있는 공간이죠.

 

그렇게 표면적으로 보이는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면, 비어있는 곳으로 들어가죠. ()입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전자 중성자 양성자도 분자도 없어요. '사물'이 없어요.(No 'thing.') 내가 방금 준 것으로 시각화를 할 수도 있고요. 강물을 시각화해서 그것이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분자들 사이는 고요히 비어있음을 시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의 흐름을 초월하면 그 움직임의 배경에는 고요함이 있죠.

 

움직임은 뭔가와 연결된 운동입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것은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아주 점진적인 움직임이고, 비교라는 것은 없어요. 모든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고요함의 배경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강에 올려놓고 명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생각들이 올라올 때마다, 강물의 소용돌이처럼 봅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더 들어가면서 초월하여 가게 되고 결국 고요함에 이릅니다 

So you might meditate in your mind on a river.

And as thoughts come up, you see that they are like swirls in the river.

But as you go into them and go beyond them, you eventually come to stillness.

My point, then, is that when a thought comes up, you do not then seek to fight it.

But neither do you flow along with it.

You go right into it. You go through it. And you look for what is behind it.

(여기가 핵심인데, 어떻게 한다는 걸까?)

Another thought might come as a result. Go into it, go through it. Look for what is behind it.

If another thought comes up, go into it, go through it. Look for what is behind it.

Keep doing this, my beloved, and you will eventually reach some measure of stillness.

 

나의 요점은, 생각들이 올라올 때마다 당신은 그것과 싸우려하지 말라는 것이죠. 생각을 따라서 같이 흘러가지도 말고요. 생각 속으로 곧장 들어가세요. 그것을 통과하여 가세요. 그리고 그것의 배후를 찾아보세요.

 

결과적으로 또 다른 생각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안으로 가세요, 그것을 통과해 가세요. 무엇이 배후에 있는지 살펴보세요. 또 다른 생각이 올라오면, 그것의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해 가세요. 무엇이 배후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이렇게 계속해보세요. 마침내 당신은 고요함의 어떤 지점에 닿을 거예요.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라

Spend time in the stillness

 

매일 매일 그것을 연습하세요, 그러면 빠르게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의 흐름 너머의 배경에 고요함을 체험하세요. 그 고요함은 당신의 정체성인 현존이며 그 존재함의 감각, "나는 현존한다(I AM,신적자아)."의 감각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존재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생각, 오로지 "나는 현존한다."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죠. (여기도 오역이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모든 느낌, 모든 감각을 초월하여 가게 되면 당신의 신적자아이며 현존의 핵심인 존재함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Keep practicing it day after day, and you will come to a point, where you can quickly go into the stillness and experience that behind, beyond, the stream of thoughts, there is a stillness a Presence that forms your sense of identity, your sense of Being, your sense that “I AM.”

And it is only because you have that sense that “I AM” that you can have thoughts come through your mind, through your being.

And so by going beyond every thought, every feeling, every sensation in the mind, you can come to that ground of Being that is the core Presence, your I AM Presence.

 

 

그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강요 없이, 열망 없이, 의문 없이, 기도 없이 고요함으로 시간을 보내세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저 현존을 체험해보세요. 질문도 답도 변화도 요청하지 마세요. 현존을 기꺼이 체험하세요.

And then, spend some time in that stillnesswithout forcing, without wanting, without asking, without praying for anything. Be content to simply experience the Presence, my beloved.

Do not ask for anything, any answers, any changes. Be content to experience the Presence. And when you feel that it is time to move out, then take a little time to gently return to a normal state of consciousness.

 

 

그만 둘 시간이라고 느낄 때, 천천히 일상의 의식으로 돌아오세요. 이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명상이 아닙니다. 익숙해지면 매일 몇 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면, 밖에 나가 무엇에 대한 기대나 갈망 없이 당신의 일상 업무를 그냥 하세요.


그러나 그 현존과의 접촉이 얼마나 외적인 마음에 새로운 사고들과,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촉매가 되었는지 놀라게 될 거예요​​. 당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지구 같은 분위기속에서 만들어진, 집단의식에서 오는 상식에 고정된 부분이 아니죠.

But you will be surprised how contacting the Presence can be the catalyst for bringing new thoughts, new perspectives, new ideas to your outer mind.

Ideas that you realize are not part of the general static that goes on in the atmosphere of this Earth from the mass consciousness, but come from a higher realm, have a certain measure of infinity in themand therefore allow you to be in that creative flow and bring forth new solutions, new perspectives.

 

 

그것은 더 높은 영역에서,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함 속에서 나오는 것이죠. 당신에게 새로운 해결점,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는 창조적인 흐름으로 안내하죠. 그 현존과 조율함으로써 당신은 그 고요함의 느낌을 나눌 수 있게 되죠. 그 지점에서 당신은 고요함에서 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때 당신의 언어는 집단의식이나 세속적으로 소유한 마음으로, 또 다른 고정된 형태에 대항하려는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죠.

대신, 그 말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흘러나오죠. 그 말들은 무엇인가에 고취되어 있어요. 그 말들은 현존과 함께 고취되어요. 그러므로 그 말들은 사람들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죠.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그들이 초월하도록 도와주죠.

And then, as you tune in to that Presence, you can also begin to carry the feeling of that stillness with you.

You will come to a point, where you can begin to speak from the stillness.

So that your words are not flowing out of the static of your own mind or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seeking to counteract some other form of static.

[Instead] they flow from a deeper level; they are imbued with something.

They are imbued with a Presence, and thus, they reach people at a deeper level.

For they touch them in the heart and help them see beyond.

 

 

 

매우 직접적이고 대립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유효한 도전방식이 있어요. 여러분 중의 일부는, 적어도 자신의 현재수준에서는 자연스런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식이든 여러분의 현존을 공유함을 숙고해 볼 가능성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에, 선형적인 마음과 단지 언어로 나타내는 것 이상이 있음을 말해주고 싶네요.

 

사랑하는 그대여, 그렇게 진짜인 뭔가(something)가 채워집니다.

There is sometimes validity to challenging people in a very direct and confrontational way.

For some of you, this is a natural expression, at least at your present level.

I am not hereby saying that all of you should express yourself in the same way.

I am simply saying that all of you have the potential to consider sharing your Presence in some way, so that there is more to the words than just the words and the linear mind.

So that they are infused with something that is genuine, my beloved.

 

 

 

나는 진정으로 영적인 것을 요청합니다 I call for a genuine spirituality

 

지구에 사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을 보세요. 주일마다 TV에 나와 전도하는 목사들을 보고, 그들의 영적인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세요. 두려움과 통제를 위한 에고나 선형적인 마음에서 오는 표면적인 수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세요.


이 시대에 새로운 영적인 일깨움은 그런 외적인 마음에서 오는 설교는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가 깊이 있고 가슴을 울리는 무엇인가 진짜를 위한 열린 문이 될 사람들만이 할 수 있죠.

And then, realize that if there is to be a new spiritual awakening in this age, it will not come from those who preach from the outer mind.

It will come only if there are those who will be the open door for something deepersomething genuine that touches the heart.

 

이 시대에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는 영성을 순수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죠. 영적이고 종교적인 무대 속으로, 영적인 토론 속으로 신선한 목소리를 가져오는 것이죠. 거기서 당신은 한편으론 특정한 어떤 종교에도 기대지 않고, 과학이나 물질만능적인 관념에서 종교를 공격하는 다른 측면에도 기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중도(the Middle Way)를 발견하는 것이죠.

 

고요함 속에서 말하기에 당신 자신인 그 현존으로 당신의 언어를 채웁니다. 당신이 그 현존임을 알기 때문이죠. 그 현존의 표현으로서 당신이 거듭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모든 것을 언어로만, 당신의 행동으로만, 당신의 사고와 느낌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가장 기쁜 감각과 성취감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에고는 옳다고 여기는 어떤 것을 설득하는데 만족감을 찾아요. 그렇지만 당신의 더 큰 존재인 현존의 흐름을 느끼는 더 깊고 큰 기쁨이 있어요. 그 창조적인 체험과 그것을 표현하는 느낌 안에서 어떤 확장된 깊은 즐거움이 있어요.

 

처음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새로운 방식과 더 깊은 방식으로 응답할 많은 것을 보게 될 거예요. 당신의 현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현존에 조율하게 되어 사람들은 깨어날 거예요.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현존을 나눌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치 물에 파문이 퍼져가듯, 새로운 온전한 영적 운동이 일어나죠. 특별한 결과를 기대하지 말고, 단순히 당신 자신인 현존을 공유할 바람으로 현존을 표현하세요.

 

 

 

 

봉사에 대한 대가는 더 한 봉사이다

The reward for service is MORE service

 

이것이 14번째 광선의 에센스입니다. , 사나트 쿠마라는 이 광선의 입문을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게 지구의 생명흐름들에게 이 광선을 대표하기로 서약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그것을, 이전의 가르침들에서 보여준 것들을 초월한 가르침으로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월해서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이원성 의식을 넘어서 자부심과 우월감과 높다는 생각을 초월하여 자신의 눈에 든 들보를 보려고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있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월함이나 자부심의 근거로 삼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나, 사나트 쿠마라가 지구 깊숙이 들어가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피하지 않고 여러분의 현존과 함께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자신을 초월하여 세인트 저메인, 예수, 붓다와 그리고 상승영역에 있는 다른 모든 상승호스트를 위한 더 훌륭한 하인들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의 특혜를 받고 있습니다.


봉사의 대가는 더 한 봉사입니다. 그렇게 더 훌륭한 봉사를 줄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물질영역에 구현된 7광선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광선에서 8번째 광선까지는 8자 형상의 흐름으로 통합하죠. 8자 형상의 더 낮은 부분 안에 처음 7존재가 있어요.

 

물론 균형이 창조의 본질이죠. 그렇게 무엇보다 중요한 7광선들이 있어요. 내가 14번째 광선을 말하고 있지만, 15번째는 위에서 7개를 완성하고 아래 7개를 완성하면 하나로 통합되죠.

 

15번째는 선형적인 마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습이나, 형태라고 할 수 없는 광선입니다. 정말 말로 묘사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알려주는데, 그것을 숙고해보세요. "조건 없음"을 숙고해보세요. 조건 없음도 초월하여 그 무한한 무한성으로 가세요.(the Infiniteinfinity) 무한함으로...,

 

처음 8자 형상의 꼭대기는 창조주의 특이점입니다. 그 창조주는 무한이므로, 조건도 없으며 단어나 이미지로 잡아낼 형상이 없어요. 그래도 여러분의 의식적 자아는 그 창조주의 확장이므로, 모든 조건들을 넘어서 그 창조주의 현존을 당신이 체험할 수 있어요.

 

그 창조주 또한 자신의 현존을 공유할 바람이 있으므로, 당신이 형태의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죠. 단순히 그 창조주는 자신의 현존을 나누어 주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도 그것과 함께 하죠, 그렇지만 창조주의 무한한 현존을 누릴 가장 최선의 방법은 당신의 무한하고 신성한 현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받는 대로 주는 것이죠. 빛이 온 것을 체험했다면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흘려보내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마음, 그 하나의 품성(the one Mind)의 특이점에서 나온 궁극적인 빛의 체험을 한 당신을 통해 온 빛을, 남들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제 새해의 컨퍼런스에서 시작된 빛의 방출이 완성되었음을 커다란 즐거움과 함께 봉인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개인적인 치유와 전체성을 구현하는데 실로 권능을 발휘할 일관적인 전체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것이 진정한 마스터키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선형적인 마음으로 구하려하지 않으며, 기꺼이 내면의 체험을 초월하여 말의 원천인 성령과 함께하는 직관적인 체험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말로 된 표현을 초월하여 그 현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운동의 일부로서 이 가르침을 펼치는데 토대가 되어주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우리의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