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수행자와 성욕(性慾)

빛몸 2018. 12. 13. 13:42

 

 

2018년 11월 07일 수요일 맑음

 

저녁에 불교 성전을 읽는데 고타마 싯다르타와 제자들의 문답 내용을 읽다 보면 유독 그는 제자들에게 음욕에 대한 경계를 상당히 강하게 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르침 중에 구경각으로 가려면 반드시 청정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왜 그렇게 음욕에 대해 강한 경계를 한 것일까? 그의 일화들을 읽어보면 수행자가 경계해야 할 집착 중에 성욕에 관한 부분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싯다르타 자신도 수행 중에 음욕에 대한 부분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나 예수 같은 성인들도 우리같은 후배 수행자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신(神) 적인 존재로만 다가가면 안 될 것이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으로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고 성인이 된 것이다. 상당히 인간적으로까지 들리는 "성욕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결코 성불하지 못했으리라"라는 그의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경계했으면 여인의 몸에 성기를 넣느니 차라리 뱀의 아가리에 넣는 것이 더 낫다고 했을까?


불교의 핵심 사상이 모든 것에 집착과 애욕을 끊고 해탈을 하는 것인데 아마도 성욕은 인간의 욕망 중에 가장 큰 집착이자 갈애가 될 것이다. 결국 음욕이야말로 모든 집착의 결정체인 것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집착과 갈애가 끊임없는 윤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성욕은 바닷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갈증을 일으킨다. 즉, 한번 빠져들면 그만큼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 수행자가 과연 성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연정화기가 되고 구경각으로 가기 전까지는 딱히 방법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대로 그냥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수도 없이 시험하고 또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자동차 사고를 줄이려면 속도를 늦추는 방법밖에 없듯이 성욕 또한 끊임없는 절제로 여자를 멀리하는 수밖에 없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수련생이 연정화기가 되어도 습관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아상과 습기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성욕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에 여인들의 출가를 무려 세 번이나 반대한 것이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여성과 성관계를 하면 기운이 흐트러지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손기현상이 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불교 성전에 나오는 글로 수디나라는 제자가 속세의 그의 부인을 만나고 음행을 저지른 후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해하자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음욕에 대한 경계입니다.


"수디나여, 들리는 말과 같이 너는 정말 그런 짓을 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 저는 부정한 짓을 범했습니다. 그 뒤부터 마음이 이유 없이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꾸짖으셨다.


"네가 한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위의가 아니며 사문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청정한 행동이 아니며 수순(隨順) 하는 행동도 아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수디나여, 청정한 법을 수행하여 애욕을 끊고 번뇌를 없애야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을 어찌하여 잊어버렸는가?"


부처님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대지 마라. 이와 같은 인연은 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애욕은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 같으며,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애욕을 떠나 도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음란한 마음만 없다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만약 음란한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근기가 뛰어나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음행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마군의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는 그러한 마군의 무리들이 성행하여 음행을 탐하면서도 선지식 노릇을 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애욕과 삿된 소견의 구렁에 빠뜨릴 것이다.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먼저 음욕부터 끊게 하여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첫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음욕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모래를 가지고는 백천 겁을 찐다 할지라도 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음행하는 몸으로 불과를 얻으려 하면 아무리 미묘하게 깨닫는다 하여도 그것은 모두 음욕의 근본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이 음욕이므로 삼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을 것인데 열반의 길을 어떻게 닦아 얻는단 말인가. 음란한 뿌리를 몸과 마음에서 말끔히 뽑아버리고 뽑아버렸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비로소 부처가 되는 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여래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 말은 마군의 말이다."

 

아래의 글은 수행자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을때 취해야 할 행동을 아난다와 세존의 문답내용이다.

 

"세존이시여, 매혹적인 여인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을 다 잡아야(알아차림)한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수련중에 보고 듣고 느낀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으로 객관적 사실성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수행자와 성욕(性慾)|작성자 적림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