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의 삶
깨닫게 되면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통당하는 경향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기 일쑤지만 이러한 경향은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를 알고는 대단히 놀라곤 합니다.
에고는 영적으로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더 미묘해질 뿐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깨달음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깨달아감에 따라 자신을 다른 무엇과 동일시하는 경향은
점차 크게 약화되거나 사라지며 그런 방향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게 됩니다.
잠시 동일시할 수는 있지만 그런 낡은 이야기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깨달음 자체에 집착하곤 합니다.
깨달음에 수반되는 확장된 상태에 계속 머물려고 애쓰면서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삼으려 듭니다.
아마 다들 깨어난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 자부심으로 인해
영적 에고가 부풀려지는 경험을 한번쯤은 해봤을 것입니다.
고착하려는 이런 경향의 또 다른 표현은 '공'의 상태에 도달하고는
그것을 단지 공허함으로만, 지루함으로만 경험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어느 깊이에 멈추어서 계속 그 상태를 고수하려고 애쓰면
깨달음은 순식간에 생기 없고 지루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깨달음의 경험을 비롯한
긍정적인 경험에 집착하는 이런 경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조건지어짐"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지만
이러한 조건지어짐은 전체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일시나 집착은 '의식' 자체의 능력으로 우리가 뿌리 뽑거나 고쳐야할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라고 여기는 이런 환상에 관여하는 것은
바로 의식입니다.
깨달음 이후에 의식은 자신이 꿰뚫어본 "나는 한계 없는 의식"이라는 진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덫에 흔히 걸려들곤 합니다.
이런 경향이 나타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비심으로 그것과 만나고,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집착까지도 포함하여)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나 반응이 일어나든 그것을 부정하지도 말고
거기에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고착하려는 이런 경향에 깨어 함께 머물면서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 근원을 찾아보십시오.
처음부터 그것은 의식의 믿을 수 없는 놀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가리는 것(환상)이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나
모두 그 안에는 대단한 풍요로움이 존재합니다.
깨달음 이후 에 또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의 양입니다.
우리는 상당한 양의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을 물려받기 때문에
그것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을 만나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의 진실을 볼 수 있고,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깨달음 이후 유일하게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조건지어짐에 관한 진실을 기꺼이 명백하게 보고자하며,
따라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주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건지어짐이나 오해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그럼으로써 어느 누구도 그것들로부터 고통당하지 않게 됩니다.
"나"라는 환상을 꿰뚫어보았다고 해서 조건지어짐이
단번에 끝장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조건지어짐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상대적인 세계, '업karma'의 세계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조건지어짐의 양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런 환상을 꿰뚫어본다면 어떤 조건지어짐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음이 드러납니다.
진실로 그것은 "나의" 조건지어짐이 절대 아닙니다.
많은 양의 조건지어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기여할 부분이 그만큼 더 많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많은 조건지어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만큼 더 많은 고통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묶음의 조건지어짐을 끝장내면
우리는 다른 묶음들도 풀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심지어 어떤 조건지어짐이 일어날 때
"야, 이번 건 뭐지? 이 아래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하고 흥분하기조차 합니다.
보살이란 세상을 고통에서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유보하는 사람입니다.
보살은 완전한 의식과 사랑을 지낸 채 "지옥"까지도 내려갑니다.
"나"의 조건지어짐은 다 끝낼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 전체의 조건지어짐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보살이 할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건에 길들여진 환상을 자유롭게 해주고 숨어 있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밝히는 노예가 되는 셈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직업입니다.
그러니 보수가 아무리 낮은 들 어떻습니까!
- 니르말라, <나는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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