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살아 있는 성인으로 불리우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님의 글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기까지의 마음상태 변화 등을 잘 말씀해 주셨네요 '위대한 존재'는 침묵 속에서 평화를 실어 나른다. 삼라만상은 그분에 의해 그분 안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존재하며, 그분의 실재를 경험한다. 그분은 무한히 온화하지만, 바위와 같기도 하다. 그분과 함께 있을 때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영적인 기쁨은 설명할 길 없는 고요한 황홀 상태에서 나타난다. 시간 관념이 멈추고, 근심 걱정도, 후회도, 고통도,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쁨의 원천은 끝이 없으며, 언제 어디에나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더 이상 상실감도 없고, 슬픔이나 욕망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흠이 없다. 시간이 정지할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문제란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위대한 존재'가 있는 한, 육체와 마음의 분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 속에서 침묵이 점점 커져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되면 '순수 의식'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삼라만상과 온 우주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시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은 의아해하곤 한다. '이러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체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적어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내 열망은 아주 강했다. 그런 다음엔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법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자비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비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엔 모든 욕망을 기꺼이 멈출 수 있어서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의지를 항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생각, 느낌, 욕망, 행위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 그럴 때만이 마음의 평화는 커져간다. 처음에는 모든 문장과 구절들을, 그 다음엔 생각과 관념까지도 나는 신에게 바쳤다.
자신의 생각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은 채 나아간다면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고,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다. 결국, 나는 생각으로 무르익기 이전의 에너지까지도 신께 맡길 수 있었다.
일상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도 나는 언제나 정신을 집중하여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명상하는 도중에도 산만해지는 순간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주 힘겹게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습관화되고 자동화되어 점점 쉬워졌으며,
나중에는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만 일단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타성에 의해 저절로 움직인다. 홀연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깨어 있음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졌고, '위대한 존재'는 실수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며, 거기에 계셨다. 자아가 죽는 아픔도 없지 않았지만, '위대한 존재'의 절대성이 경외의 불빛을 비추며 격려해 주었다.
자아의 죽음과 함께, 이제껏 알아 왔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황홀한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감이었다. 격심한 충격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위대한 존재'와 함께 있는 사랑이 떠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보호와 도움이 없다면 누구라도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을 치는 순간에도 공포가 다가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 자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에고가 죽은 그 자리에는 진아가 들어섰다. 모든 것이 오롯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진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는 곧 모든 것이라는 인식이 뒤따라 주었다.
그 하나는 온전히 모든 것이었고, 완전했다. 모든 신물을 뛰어넘어, 모든 성(性)을 뛰어넘어,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는 이제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런 경지에서는, 신체의 무엇이 일어나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영적인 깨달음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신체의 병은 저절로 없어지거나 가벼워진다. 하지만 절대의 상태에서는, 그런 현상들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
육체는 예정된 과정을 밟은 후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고,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육체는 '나'라기보다는 '그것'이 된다. 방안의 가구 같은 또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너'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만, 이러한 상태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로 깨우쳐 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섭리'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에도 한때 축복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그 강렬한 황홀감을 숨기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 오라와 함께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영적인 추구자나 영혼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때 그는 그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될 수 있고,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깨달은 자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들과 나누고 싶고 모두의 유익을 위해 그 깨달음을 사용하려는 욕망이 있게 된다. 이 상태를 동반하는 황홀경이 절대적으로 계속되는 것만이 아니다. 번민의 순간들 역시 존재한다. 가장 큰 번민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황홀감이 그쳐 버리는 것이다.
심한 절망감에 빠지는 이런 시기에는 위대한 존재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락은 우리의 여정을 힘겹게 하며, 상황을 환원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의지가 필요하다.
이 수준을 초월하거나 ‘은총의 하락’의 뼈아픈 고통을 항구적으로 감내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역시 이원성을 초월하는 힘겨운 과업의 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황홀경의 영광 또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아경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금사슬을 끊어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치 신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고,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두려움이 일어난다.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비존재의 두려움이 엄청난 것이어서, 그런 두려움이 다가올 때면 번번이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민에 사로잡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새우고 나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이 주어지는 것은, 극도의 노력을 아끼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왕래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존재 자체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전부와 무를,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과업이 가장 어려운 고비이고, 최종적인 분수령이다. 이 정점에서 존재에 대한 신기루를 초월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단계에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으며, 돌이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 마지막 장벽이 되어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자아의 이 마지막 대전환의 지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을 푸는 것은, 우주적 신성에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개인적인 의식도 선택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 마지막 단계는, 그때, 오직 신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데이비드 호킨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