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진리 탐구(1)

빛몸 2018. 4. 17. 07:26

진리 탐구(1)

깨달음이라는 영적인 진리의 자기실현에 대한 탐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자신이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에서부터 출발하세요. 모든 진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됩니다. 검증된 가르침을 지침으로 사용하세요.


영원한 진리와 같은 실체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모든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다'라는 아주 중요한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진리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다. - 옮긴이)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 일로 인생을 허비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혹 존재
한다 해도 그것에 대한 완전히 주관적인 체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발견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는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완전히 객관적인 물질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조차 우리의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과격한 유물론자도 결국에는 유물론에 신뢰할 만한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앎일 뿐이라는 사실에 봉착하고 맙니다.



객관적인 리얼리티와 주관적인 리얼리티의 차이점은 존재하지 않나요?


모든 리얼리티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밖의 다른 입론(立論)들은 이원성에 기반을 둔 환상입니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같은 것입니다. 지각의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다른 설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리얼리티는 지각과 지속(持續), 서술, 형상, 측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속성들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고, 임의적이고, 제한 되어 있고, 가공적이고, 이원적인 지각 자체의 속성들입니다.


위대한 스승과 그 가르침은 어떤 점에서 소중한가요?


그들의 능력은 정보와 사실, 지혜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것이 방출되는 의식의 레벨이나 힘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습니다. 위대한 힘은 맥락의 순수함에 의해 지탱됩니다.
그런데 많은 가르침의 유용한 측면들이 후세 사람들이 잘못된 맥락 속에서 가르치는 바람에 크게 훼손되었고, 그로 인해 원래의 의미는 가려지거나 왜곡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류가 어떤 종교나 신학적인 교리, 위치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섭고 끔찍한 행위 패턴을 역사적으로 거듭거듭 반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류가 저지른 모든 범죄는 권력, 명성, 부, 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경전에 나오는 말'이나 당연히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왜곡된 주장을 펴는 바람에 용서되고 합리화 되었습니다. 교리가 진리로 위장한 채 수많은 슬로건을 제공하고 있고, 그 슬로건들은 신성함과 경건함으로 위장하고서 오만한 자세로 모든 문명을 섬뜩하고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런 제국들은 반드시 소멸하고야 맙니다.


<신>, <참존재>, <불성>, <그리스도>, <아바타>, <진리>, <깨달음>,
<참나>, <크리슈나>, <참 성품>, <참다운 앎>, <하나>, <절대>, <전체>,
<총체>, <신성> 등이 갖는 의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차이점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형태들은 그 가르침들을 낳은 문화를 반영하죠.



하지만 그런 가르침들에 내포된 진리는 서로 다르지 않나요?


다른 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단지 잘못 이해한 탓이고, 맥락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죠. 종교들간에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참으로 영적인 가르침들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영성은 통합하고, 종교는 가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진리는 스스로 존재하고,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모든 것을 두루 포괄하며, 거처
(居處)와 지속과 부분이 없죠. 진리는 전체성 속에서 그것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명하고, 주관적인 "나"의 상태인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어우릅니다.
전체성은 어떤 나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란 무엇인가요?


"무한한 나(Infinite I)"는, 개인적인 "나(I)"의 근원이 되고 존재 상태로서의 "나(I-ness)"
의 체험을 허용해주는 주관적인 실체입니다. "나는 존재한다(I Am)"란 진술을 성립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절대적인 "나"입니다. 데카르트는 말을 거꾸로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당연히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입니다.

의식, 혹은 앎의 능력은 형상이 없으며, 형상을 식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줍니다. 형상
이 지각될 수 있는 것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의 형상 없음 덕입니다. "무엇인가"
가 식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 구름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맑은 덕이죠.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영적,철학적 가르침들을 연구하면서 무수한 생을 보냈는데도 결국 혼란과 낙담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 무엇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려고" 하세요. "앎"은 주관적인 체험을 뜻하고, "무엇 무엇에 대한 앎"은 사실들을 그러모음을 뜻합니다. 결국 모든 사실들 중 사라지거나 알려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참나>가 지금 존재하는, 과거부터 존재해온, 혹은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전체임을 깨달을 때,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이 남아 있겠어요?
완전함은 자체의 본성에 의해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알아야 할 게 없어진다니,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요?


일단 당신이 무엇인가가 되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알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안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뜻합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항상 그래왔다는 걸 깨달으면 더 보탤 게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오로지 거짓된 자아,에고가 스스로를 형상과 동일시해서 자신을 그 한계에
가두기 때문이죠.
 


그럼 "배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실재>를 알게 될 때 모든 배움은 그칩니다. 마음은 침묵하게 되죠.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의 의미와 진실을 드러내고, 존재의 본성이 경의로운 만큼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은 <참존재>자체로서 신성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존재하는> 것과 <신성한> 것은 하나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에서 <드러난 것>이 나타나며, <드러난 것>도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드러난 것 대 드러나지 않은 것의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임의적이고 제한된 관점인 지각을 초월할 때, 차이점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이원성을 빚어내는 것은 지각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인 결론이 아니라 경험적인 사실입니다. 철학은 유용한 것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어떤 철학도 성립 될 수 없다는 진실에 대한 지적인 등가물에 불과합니다.



그럼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들은 뭔가요?


서술에 대해 논의하고 있죠. 하지만 그것들의 배후에는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진실
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르침과 발견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나요?


그것과 관련된 정보는 직관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여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
를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를 내보이는 선물을 허락해 주기 위해,
그때까지 준비해온 앎의 장에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진리와 깨달음은 얻거나 획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이 성숙될 때 스스로를 드러내는 상태나 정황입니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겸허한 자세는 이 세상의 모든 사실들을 긁어 모으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외경스러운 절대적인 <전체성> 속에 내재하는<신>의 존재를 완전하고도 전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사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그때까지 축적해온 모든 지식이 무지와 교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안다"라는 주장은 아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 진술 자체가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해 줍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지식은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걸까요?

"나는 안다(I know)"는 생각은 참다운 "존재(I am)"의 궁극적인 앎을 방해합니다. "안다"는
말은 이원적인 것이고, 별도의 주체인 "아는 자"와 알려지는 외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면, 아는 자와 알려지는 바의 구분이나, 주체와 객체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것이야말로 지각에 의한 관찰점을 전제로 하는 이원성의 본질적인 오류입니다. 사실, 주체와 객체는 하나입니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단지 제멋대로 하는 말에 불과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