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진리 탐구(2)

빛몸 2018. 4. 17. 07:29

진리 탐구(2)

 

 

에고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가 분명 있을 것 같은데요.

생각과 관념이 계속 형성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모든 생각이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 하세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관념에 매혹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가치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다면 교육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육은 생각과 행동의 흐름에 신뢰할 만한 요소를 부여해줍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는 하나, 깨달음으로 인도해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교화하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되지만 깨닫는다는 것은 그와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 교육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실체는 있지 않나요?



분리되어 보이는 모든 것은 생각이 지어낸 것들입니다. 마음이 늘 하나의 관점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듣고 있는 환상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에고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지각적 환상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위치성의
소산입니다. 자신의 경험적인 앎 속에서 이 점을 명확히 규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조심스럽게 관찰해보면 마음이 하나의 입장을 취할 때, 그 입장은 선택과
훈련, 욕망, 정서, 정치적.종교적 관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교화하는 이들이 제멋대로 정한 위치성에 근거해서 모든 행위와 사건들은 옳고 그른
것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위치성에서 모든 무의미한 희생과 고통이 일어납니다.


그런 오류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심판하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에고들 중에서 가장 오만한 것입니다. 성경에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께서는 "심판하는 일은
나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붓다는 "지각은 망상만을 볼 수 있으므로 판단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각은 늘 부분적이고, 자의적인 맥락에 의해 제한받습니다. 진실로 그 어떤 판단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가 있겠어요?


그것은 늘 합리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학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는 기본적인 공리를 배웁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공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태도를 낳고, 중대한 영적인 오류를 저지르게 됩니다. 야만적인
행위를 호도하기 위해 "좋은" 결과를 끌어다 붙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영적인 전체를 침해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침해는 사회구조 자체를 무너뜨리고, 불의와 범죄와 모든 형태의 고통이
만연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인류가 그런 비탄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지와 여러 가지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의식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본질에 대한 앎은 모든 문제점과 한계와 시도의 핵심을 명확히
통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의식은 인간의 모든 경험과 기획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므로,
의식이야 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주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과학과 의식에 관한 국제회의
가 자주 열리며, 많은 이들이 그 회의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 참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런 노력들은 인간이 가진 지선의 주요한 한계를 답사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큰 지장을 받아왔죠.

 
<참된 앎>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 이원성 그 자체라고 들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원성은 분리라는 환상의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토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
작용과 수많은 판단, 가치관, 선택, 편견, 의견의 총합에서 비롯된 하나의 위치성에서
나옵니다.

생각과 판단, 가치관 등은 다시 기호 체계와 제한된 패러다임, 맥락의 한계에서 비롯
됩니다. 우리는 맥락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함으로써만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최면 상태에 빠뜨립니다. 다수의 동의라는 권위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지침을 자기 내면이 아니라 밖에서 구합니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개인의
의식은 집단무의식과 집단행위 속에 용해되어 버립니다. 도덕은 집단 히스테리에 의해
침묵하고 맙니다.

뉴스 미디어의 선전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결국 진실이 드러
나고야 말지만, 진실은 대체로 너무 늦게 나타나곤 합니다. 과거에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던 수많은 죄수들이 DNA 테스트를 통해 무죄임이 밝혀진 사실을 보면, 인간의
오류가 얼마나 많은 비극을 초래하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법적 증거는 지각에 해당되고, 지각은 오류의 원천이므로, 이른바 재판제도라는 것은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진실은 투표를 통해서 밝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배심원들의 결정은 사실이 아니라 의견에 불과합니다.

감정 상태가 지각을 가리는 작용을 하고, 따라서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원성은 진실과 오류의 분리와 다름 없으며, 이러한 분리의
원천이 되는 것은 지각과 에고의 망상입니다.

 

지각은 어떻게 해서 이원성을 빚어내나요?


자의적인 선택은 하나의 위치성을 낳습니다. 그 위치성은 하나인 <실재>를 나뉘어진 듯
보이는 부분들로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관점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외관상으로만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 <실재> 속에서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분들로의 그러한 분리는 <실재>
속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만 일어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여기"와 "저기"를, "지금"대 "그때"를 이야기하고, 삶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우리가 "사건들" 내지는 "일어난 일들"이라고 부르는 부분들을 입맛대로 선택하곤
하는 습관에 젖어듭니다. 이런 사고 과정은 인과율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낳는 심각한 결과
를 초래하고, 이런 잘못된 이해는 무수한 문제와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선생님께서 인과관계의 본질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크게 강조하시는 이유를 이해하겠습니다.



마음 속 생각들의 작용에 의해 개념적으로 분리된 것들을 다시 연결
시키려고 할 때, 우리는 "관계"로 보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
관계를 창안해냅니다. <실재> 속에서는 오로지 동일성만이 존재합니다.
<실재> 속에서는 "이것이 저것을 일으킨 듯하다"는 식으로 뉴턴의
선형적 인과율의 패러다임에 등장하는, 어떤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실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고, 그 전체적인 하나됨은
시간과 공간, 분리아 정의를 넘어서 있습니다. 어떤 것도 다른 것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려면 반드시 시간과 공간상의 이원적인 분리가 따라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드러나는 것은 창조에 의해서 그렇게 됩니다. 모든 것은 존재로서 표현
되는 그것들의 본질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고작 상태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의 "원인"이 태초부터 지금에 이르는 전(全) 우주의 총체, 존재
로서 표현된,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임을 깨닫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모든
것은 동일성의 한 표현으로서 존재하며, 모든 것의 본질은 그 현존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신성한 표현에 의해 존재로서 저절로 창조됩니다.

그러므로 개개의 "사물"은 오로지 전 우주의 총체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알갱이의 먼지도 방을 필요로 하고 건물을 필요로
하며. 그 건물이 위치한 지역, 하나의 대륙, 하나의 행성, 태양계, 은하계,
우주 등등을 필요로 하는 공기의 흐름 없이는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놓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진술은 주관적입니다. 거기에 사건들의 선형적인
진행, 순서, 인과관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존재의
표현으로서 있는 그대로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그 자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에고는 "나쁜 것"인가요?

에고의 문제점은 나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되고 왜곡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에고를 적으로 여기면 양극화되고, 갈등과 죄의식, 분노,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위치성들은 에고에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맥락을 확장시키면 양극은 초월되고, 문제점들은 해소됩니다.

겸허한 자세는 에고의 기반이 되는 심판하려는 태도, 위치성, 도덕군자 같은 태도 등을 없애줍니다. <실재> 속에서는 어떤 양극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승자나 패자가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예컨대 환상의 세계에서 통계는 한계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규정하느냐에 좌우됩니다. 분류 방식을 바꾸면 통계는 변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범죄율은 정치적 압력 여하에 따라서 높아지는 것처럼 보이게도,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통계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떤 요소를 집어넣고 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표준을 높이거나 낮춤으로써 어떤 사회 현상을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게도,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각에 의해 서술되는 세계는 자의적인 것이며, 사회적 "현실"은 우리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부르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정한 모양대로 나타납니다. 정의(定義)는 지각의 범위를 한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