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스님 대사님

대행스님 20 -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빛몸 2018. 4. 13. 09:10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근본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그리고 셋째도 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첫째도 죽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일체를 놔라!”, “맡겨 놔라!”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에다 놓느냐?”하고

여러분들께서는 묻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있으니까 상대도 있듯이 바로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일체가 있고 또 우주천지와도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몸을 갖고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도 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소소영영하게 보는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 빛보다 더 빠르게 우주천지 어디든지 비춰 볼 수 있는 이 신통묘용의 주인공, 이 마음이야말로 바로 모든 여러분의 참 나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마치 영구히 발전하는 자가발전소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밝은 자가 발전소.......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는 대로 그것은 마치 코-드의 스위치를 올리는 거와 같아서 자가 발전소에서는 전력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는다”, “맡겨 놓는다”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코-드의 스위치를 올리는 역할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철저히 믿고 오로지 맡겨 놓으시란 말입니다.

 “놓기만 하면 어떻게 살겠느냐?”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맡겨 놓음으로써 더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맡겨 놓게 되면 마음의 코-드 스위치가 올려져 자가발전소의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공급되게 되는 것이니, 생활이 곤궁한 사람은 생활이 윤택하여지게 되고, 건강이 나쁜 사람은 건강하게 되고, 가정이 화목치 않은 경우에는 다시금 가정의 화목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맡겨 놓으라고 거듭거듭 말씀 드리는 겁니다.

 마음으로 짊어진 무거운 짐을 맡겨놓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참으로 자유스러워질 것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실답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념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숱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놓는 것만이 여러분을 편안케 하고, 자유케 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탈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의 자가발전소, 참 나, 주인공을 오로지 믿고 일체의 모든 것을 맡겨 놓는다면,
안팎으로 끄달리어 일어났던 번뇌,망상,불안한 마음이 푹 쉬게 되면서, 우선 마음이 편안해짐을 알게 되며, 마음이 편안해지면, 苦도 또한 풀려 나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로, 나를 발견해 가지고도 또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체적인 나가 아닌 전체적인 나를 발견하였기에, 비록 중생심으로서의 나라는 관념은 버렸다고 하나, 아직도 나라는 것에 대한 습기(애착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나를 발견하였다 해도 여기에서 또 다시 크게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를 발견한 다음에는 어떠한 신호가 올 때도 있고, 혹은 어떤 것이 보일 때도 있고, 혹은 어떤 것이 들리는 때도 있게 되는데, 결코 거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것이 보이고 들리든지 비록 오신통이 열렸다 해도 그것은 도(道)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기가 남아 있는 경우에는 보이는 대로 걸리고, 들리는 대로 걸려서, 마치 자기가 보고, 자기가 들은 양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죽은 줄 알았던 자기가 되살아나서 다시금 더 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발견하였어도 남과 더불어 또 다시 크게 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오신통, 즉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이 되었다 해도 다시금 놓아야 합니다.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만 통을 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신통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신통에 사로잡혀 거기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기는 물론 스승과 부처님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다 누를 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신통에서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 돌아가는 도리를 배워 한마음으로
계합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보아도 본 사이가 없고,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고, 알아도 안 사이가 없는 것이니, 이 비밀을 지키며,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고, 그리고 체험을 통해서 행을 해 보는 그러한 막강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두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하고 강조하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본 바가 있다, 들은 바가 있다, 가고 온 바가 있다면 아직도 모든 것을 둘로 보는 자기(아집)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는 것이므로 비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비밀을 지키면서 비록 오신통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그 통을 자유자재로 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 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기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 통 속에서마저도 벗어나야만 되겠기에, 보는 것도 놔라! 보이는 것도 놔라!
들리더라도 놔라! 시공을 초월해서 내 몸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다 놔라! 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비밀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며, 또한 오신통을 실험하고 체험하여 마침내 구족한 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비밀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밀문은 어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절대로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밖으로 찾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찾는다면 갈 곳은 저 밑바닥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비밀문이 나한테 있는 것이니, 나의 문 즉 없는 문, 있는 문,
이 양면을 다 놓고, 그 비밀문에서 나 자신을 더욱 크게 발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오신통이라도 그것마저도 몰록 놓고 가다 보면 스스로 무심한 경지를 맛보게 됩니다. 무심하게 된다는 것은 닥쳐오는 경계를 우정 무관심할 수 있다거나, 피할 수 있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가 닥쳐와도 이미 그것을 시비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경계가 온다 해도 마음은 항상 고요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서 무심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바로 일체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도리를 터득하여 이미 하나로 계합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때가 되면 그는 오신통의 불바퀴를 요리하여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누진이라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본래부터 자기 재료가 다 풍족하게 갖춰져 있어서, 직접요리를 하여 배불리 먹을 수 있건만,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구걸을 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세번째, 세번째도 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는 분명히 있으면서도 너와 나가 없이 너가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너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막강한 나툼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우리 누구나가 다 같이 하고 있는 참마음 자체는 본래 모습이 없어서 수만 명의 모습으로 달리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일러 천백억 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고 들이는 대로 자기의 참마음은 거기에 응해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는 대로 산신을 구하면 산신의 보습으로, 관세음보살을 청하면 관세음보살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타난 모습에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나타난 모습이 자기(참마음)밖에 정말로 있다고 믿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보이든지 다 자기 참마음의 나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참마음 주인공은 모습으로도 응해주시면서 또한 마음의 자비로서도 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서 곤충, 미물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모든 생명들에게 나투며 화하면서
응하시는 부처님의 한 발 내려 딛은 보살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에게 차별 없이 그 어떠한 문제이든 지를 막론하고 다 같이 평등하게 응해 주시는 이 도리를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를 증험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자기만의 개별적인 완성이 아니라 전체의 한데 합쳐진 다 같이 돌아가는 완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진실로 너와 내가 하나되어, 모든 세상의 아픔은 내 아픔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어려움은 내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둘 아닌 부처님의 세계가 진실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 어떠한 것으로 나툴 때 그것만을 진정한 부처라고 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이것이 길이며 진리이니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없는 이름이 바로 길이며 진리이니라”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뜻을, 그 길을 믿으면서 따름으로써, 타력신앙이 아닌 자력신앙으로써 올바르게 우리의 갈 길을 똑바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과연 똑바로 가는 것입니까? 공한 불생불멸의 영원한 참 자기를 믿고, 거기에 모든 일체를
맡겨놓는 것(참 자기를 중심하여 이리로도 흔들리지 않고, 저리로도 흔들리지 않도록 양면을 다 놓는 것)이 똑바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선지식께서 “너희들이 땅을 파도 아니 되고, 아니 파도 아니 되니 그것은 무슨 연고인고?

이 도리를 알아야만 농사를 잘 지어서, 밥 한 그릇을 가지면 일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되 한 그릇이 남을 수가 있느니라.”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옛 선지식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은 우리가 꼭 말을 해야만 알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릴 수 있는 그러한 문제를 가질 수 있어야만 된다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저기 하면 저 전구를 보시게 됩니다. 물질로 만들어 논 저 전구만 보시고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밝게 들어온다는 것만 생각하시지, 순간 전기?전력이 오고 가는 것은 생각도 안합니다. 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뚱이만 보시고 생각하시지, 여러분이 본래부터 온갖 재료(지혜)들을, 즉 전력이나 광력, 자력, 입력, 통신력 등을 충만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발견하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 재료들을 갖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나도 먹고,
남도 먹이려는 생각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먹여도 먹여도 되 한 그릇이 남는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첫째도 놓아서 죽어야 하며, 둘째도 일체를 놓고 더불어 죽어 비밀을 지켜야 하며, 셋째도 또한 죽어서 더불어 나투는 법을 증득하여야만 합니다

 

 

 

 

 

            


공수래 공수거 / 변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