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대사님

구도자(求道者)의 길 4장 - (고타마붓다 메세지)

빛몸 2022. 6. 15. 10:41

 

구도자(求道者)의 길 4장

 

 

빛을 발견하였다 해도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빛은 내면중심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이정표, 가로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면의 신과의 만남을 통해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어둠이라고 하는 거짓이 사라지고, 진실이 나타날 때까지 끝없는 소통과 빛을 밝히기 위한 단계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왔던 인생들의 조각들을 하나로 맞추면서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하는 단계입니다. 전체의 그림을 보아야만 자신의 인생이 무엇 때문에 환생을 통한 체험들을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답을 스스로 얻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바퀴처럼 연결되어 회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다른 인생들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다른 인생들을 존중하고 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늙은 인생들과,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들과, 가난하게 사는 인생들과, 부자로 사는 인생들과, 남을 괴롭히며 사는 인생들과, 남에게 피해를 당하며 사는 인생들과, 원망과 시기와 질투로 사는 인생들과, 싸우고 죽이며 사는 인생들과, 거짓말하며 사기치고 사는 인생들과,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사는 인생들이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생의 수레바퀴가 되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자신의 체험임을 그래서 모든 인생들이 자신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전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에 그 모든 에고들과 인생의 편린(片鱗)들을 바람에 날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해답을 얻어낸 것입니다.  

 

 

모든 현상계의 펼쳐진 원인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펼쳐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그 펼쳐진 현상계의 원인을 제공한 마음속 그림들을 모두 인정하고 자비로서 승화하여 더 이상 걸림이 없는 상태로 전환했던 것입니다. 원인을 비워내자 그 자리에는 고요함만이 있었으며 평화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원인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밝은 빛만이 그 자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과 부딪히고 충돌하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만히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일어나던 분요는 바위처럼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고 지켜보던 자신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자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외부에 눈에 비치며 보이는 현상들은 그대로 마음속에서 형상화되어 일어나는데, 사실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들이 보이는 현상계에서 물질화되어 나타난 것뿐입니다. 그 현상들의 원인들을 제거하자 더 이상 일어나는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육체 속에 들어온 성기체(astral body)는 전기를 띠는 에너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제거하고 나면 빛의 전도체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합니다. 전등에 전기를 통하여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세상으로 변화 시킵니다.

   

 

어둠의 속성들은 이 빛에 의해 사라져 가는데 전기가 끊어지기라도 하면 다시 찾아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통과한 과정은 두 번 다시 어렵지 않습니다. 빛을 밝히기 시작하면 더 이상 빛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빛을 자가발전 하는 것처럼, 계속 승압하면서 자신을 밝히게 되는데, 이 빛을 같은 과정을 가고 있는 인류들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을 관통한 이는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지혜가 빛나게 되고, 우주의 이치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는 물질 세상에 살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물질에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병에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태어나고 병들며 늙어 죽는 것을 슬기롭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모두 달관한 이는 더 이상 인생을 사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세상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인생에 묶여 있지 않아서 자유롭게 된 이상 더 이상 머물고자하는 의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단계를 거치게 되었으며 모든 삶을 놓고 떠나고자 했습니다. 의식의 떠남을 원하던 자신을 인류들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한 것이 천상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명과 역할을 하기 위하여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보니, 남아있는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을 죽여 의식의 바다로 들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독립된 나의 의식을 전체의식으로 합류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라고 표현하는데 영단에는 70억 인류들의 의식을 주관하는 전체의식, 즉 하나인 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이 하나인 의식에 합류하려 했던 것입니다.  

 

 

전체의식은 여러분들 인생에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바로 여러분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을 관통한 이는 바로 이 전체의식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육체를 입고 하는 인생체험들이 모두 종료되고 나면 당연히 전체의식에 합류하게 되겠지만 뒤에 따라오는 인생들을 위한 자기희생, 즉 교사가 되어 인생들의 안내자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영단(Hierarchy)의 뜻인 것입니다.  

 

 

지구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면 그 역할을 찾아 실행하면 되는 것이고, 대신 아무 역할도 없이 들어왔다 하여도 자신의 정체성을 그냥 전체의식에 합류시키지 말고 후배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는 뜻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그렇게 남겨지게 된 뜻입니다. 나 또한 전체의식으로 돌아 들어갈 수 있었으나, 걸음을 다시 돌려서 중생들을 위한 봉사의 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며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영단에서는 많은 인생들이 이러한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준비하여 왔으며, 인생의 묘미(妙味)를 발견한 존재들을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인생은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다시 오는 것 같지만 경험들의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고정된 자신의 자리를 부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묶여 있으면서 인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수갑과 족쇄를 부수고 풀어서 자유를 찾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던지 모두 아름답게 보며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애쓰는 인생들을 자비의 기운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게 되면서 인생을 관통하여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완성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대사들은 같이 섞여 사는 주민들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인생들이 병들고 죽는다하여도 관여하지 않지만 사고를 당하였을 때에는 즉시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들의 도움의 요청이 있게 되면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의 행함을 지켜보면서도 우리와 같이 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과 근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실천하지 못하겠다는 연약한 마음의 결정들이 그들의 용기를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물질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합류하고 맙니다. 만일 항아리에 먹을 쌀과 빵이 없다면 벌써 근심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내일이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겠다는 마음의 근심이 그를 깊은 어둠으로 데려가고 맙니다. 그래서 몸을 움직여서 돈을 벌거나 빵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그러다 만일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면 심한 자괴감과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겠다는 마음의 독약이 그를 옭죄어서 숨통을 조여 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붙들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인생들이 아니였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자신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올바르지 않는 의식의 죽음입니다. 전체와 합류하는 의식의 죽음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 오는 환희의 죽음이지만 이렇게 죽는 의식은 인생의 공부를 끝없이 해야 하는 윤회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곁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이 덧없이 죽는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따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누르고 있는 어둠의 속성들이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그들을 눌러서 일어설 수 없도록 하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일 무엇을 먹을까? 내일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던 예수대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대원인(大元因)이신 하느님께서 먹이고 입히지 않겠느냐! 하였지요. 이때에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구해주신다는 믿음, 먹여주신다는 믿음, 그러면 쓸데없는 수고는 하지 않게 되겠지요. 예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마리아와 주방에서 음식준비에 여념이 없는 마르다 자매를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준비한 음식은 지금의 허기를 달래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오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배가 고프지 않게 해준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허기진 인생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빵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빵을 통해야만 영원히 굶주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체험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것을 모두 분리하여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저 각자들의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부자이던, 거지이든, 노숙자이든, 살인자이든, 도둑이든, 사기꾼이든, 거짓말쟁이든, 전쟁광이든, 장애인이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모든 인생들은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하여 살고 있는 인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남의 인생이 불쌍하여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은 그 인생을 방해하는 일방적인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에 도와주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고, 또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해서 그의 배움을 방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움을 요청하고 도와주는 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도움을 요청받았는데 지금 도울 형편이 되지 못하다면 그에게 도움이 필요치 않고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야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인연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억지로 돕는다고 다 도움이 아닌 것입니다.  

 

 

대사들은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인생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횡령을 일삼는 봉사단체에 후원들을 합니다. 나중에 뉴스를 통하고 나서야 실체를 알게 되어 가슴을 칩니다. 또 거짓으로 구걸하는 이를 진짜로 구걸하는 이와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도움의 손길은 내미는 인생이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인생인지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기를 당하고 엉뚱한 곳으로 돈이 새어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위하여 후원을 하거나 도움을 주게 되는데, 도움이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다 여러분들의 미성숙함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모든 인생들을 알게 되면 그들의 진실도 알게 되며, 도움이 필요한지와 어디까지 도울지가 모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들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들이 스스로 찾아내어 깨달음의 보석을 찾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사들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우리를 우상시 하거나 신으로서 바라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대등한 위치에서 대등한 관계로서 만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스스로가 어느 정도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알아서 모든 인생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고로 죽음을 통해 떠난다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인생의 프로그램을 훌륭히 잘 마무리하고 떠난 혼을 위하여 축하하며 사랑으로 빌어주면서 평화를 유지할 인생이 몇이나 있겠는지요.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성폭력을 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면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고 떠난 혼과 사건을 일으킨 혼을 위하여 사랑으로 품을 인생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지요.  

 

 

그렇지 못하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관통하여 모든 인생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제가 하는 이야기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든 인생들이 지나는 과정들을 알고 있기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고,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어떠한 인생이든지 배움의 과정에 있는 인생들이기에 누가 잘났고, 못났고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뿐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다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대원인이신 창조께서 허락한 인생들이기에 어느 하나 부족한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방해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의 방해도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훼방한 인생들에게 경고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방해이고, 무엇이 도움인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인생 공부이자,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천사들과 교사들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언과 상담을 하는 것이고, 수호천사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던 헬렌 켈러와 그의 스승이었던 설리번 선생을 알고 있습니다. 이 관계 속에는 헬렌 켈러가 설리번이라는 인생에 선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통하여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학습해야 되는지를 알아냈고 계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관계를 보더라도 모차르트를 위해 살리에리가 선생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쟁을 통하여 모차르트의 작곡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인생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성 속에서 진보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리고 악연의 인연법을 통하여 극적인 체험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것을 가르치며 자신의 인생을 감사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파노라마는 행성들을 오고가면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외곽지역의 태양에서부터 시작된 체험들이 점차 중앙태양을 향하여 전진하여 들어가면서 인생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양한 물질체를 섭렵한 다음 인류로 구분되는 옷을 입고 하는 생생한 살아있는 체험을 통과하면서 자신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3차원에서 극복해야 될 과정은 죽음을 두고 있는 두려움과 그 반대되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 클라이막스라고 표현합니다.‘두려움’은 여러분들이 죄(sin)를 만들어 냈으며 지옥(hell)이라는 세계도 지어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여러분들의 의식을 얼어붙게 하여 마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자신을 죄인으로 추락시켜 결국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이라는 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벌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여 소설처럼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과정을 두었을 까요? 

 

 

여러분들을 사랑한다면 굳이 필요 없었던 부분이었을 텐데요. 맞습니다. 대원인(大元因)인 창조는 여러분들이 물질을 경험하겠다고 결정하고 나서 영이 물질을 통과하여 아래로 하강할 때에 영(spirit)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부작용으로 자신 스스로가 하느님인 창조주가 되는 교만과 같은 감정체의 시험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상승하여 올라올 때에도 물질을 떠나 영(spirit)과의 연합을 앞두고 과거에 겪었던 부작용을 다시 겪는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교만은 이렇게 영(spirit)의 분리를 경험하면서 넘어가야하는 산맥으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두려움의 과정을 소화하면서 죽음을 극복하는 진통을 겪는 것인데,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는 절대로 깨달음의 길에 진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식이 깨어있다 하여도 혼(soul)의 영향으로 마음(mind)이 수시로 흔들리거나 얼어버린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처럼, 들을 때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의식이 열려서 천국과 극락이 곧 자신들의 것이 된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충만하게 넘치고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누렸던 평화의 기쁨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초보의 단계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첫 단계인 ‘들음’을 통하여 마음을 채우고 뇌세포를 채우는 단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아직 오픈된 것이 아니어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들음’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여 듣고 싶은 단계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들음을 통하여 자신의 세포에 진동을 보내어 계속해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들음’을 실천하여 실행하는 단계인데, 주기적으로 진동을 통해 느꼈던 느낌들을 세포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단계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실천의 단계는 자신을 든든하게 다지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믿음은 있으나 온전함으로 있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믿음은 도전을 받게 되고 심각한 도전 앞에 무너지는 경험들을 하기도 합니다. 강력한 부정 앞에 흔들리는 믿음은 마음에 부정을 불러오고, 균열을 일으키는 마음은 믿음을 무너지게 하여 심한 좌절을 겪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들음’이 마음에 고착화되는 단계인데, 믿음이 서서히 형성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포들은 ‘들음’이 세포에 주기적으로 파동을 보내는 것이 세포들이 열리는 단계로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도전이 있을 때에도 적절하게 방어하게 되면서 자신의 주관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믿음이 온전하게 발현되는 단계가 아니다보니 심각한 도전 앞에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돌아서서 과거로 돌아가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럴까 생각하겠지만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혼(soul)의 영향으로 그렀다는 것입니다. 영(spirit)이 혼(soul)을 주관하는 단계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떠한 계기가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은 후에야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영(spirit)이 마음을 주관하고 나서야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믿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함에서 벗어나게 되고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하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초인생활의 대사들의 능력들과 보여주었던 기적과도 같았던 일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너무나도 빈약하여 스스로의 패러다임을 넘지 못하고 안주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물질계에 오래 머물렀던 혼들이 스스로의 능력들을 잊어버리고 나서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  

 

 

성기체(Astral body)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영기체(spiritual body)의 깨어남이 중요한 것이고, 주관자로서의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각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는 혼(soul)만으로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spirit)이 자리를 잡고 나서야 과제들이 선명하게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들과 질서와 조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것이고, 인생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깨달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결단코 욕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하면서 이 장을 마감합니다. 여러분들 가슴에 자비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나마스테(Namas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