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V
서문 (결론)
당신이 사다리 위쪽으로 가는 길로 올라갈 때, 예수와 성령의 경험은 점점 덜 구체적이고 더욱 더 비구체적으로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이 의미는 더욱 더 사랑스럽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그리고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매우 행복하게 그 사랑의 확장이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겁니다. 그 사랑은 당신을 통해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올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당신을 통해 구체적인 상징으로 표현되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의 반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당신을 통해 나오는 것을 사랑의 반영으로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가며 위에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말하느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달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당신이 행하고 말할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이제 당신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걱정하고 고민하고 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사랑의 상징이 될 겁니다. 그것은 그저 흘러나올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 길에 가지가지 장애물, 에고의 음성인 장애물을 둔다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문제는, 당신이 에고의 음성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에고의 음성에 대해 어떤 것도 결코 할 수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살아가기 위해 숨을 쉬고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사실이 당신이 에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똑같은 숨쉬기, 먹기, 마시기, 그리고 몸과 삶에 대한 모든 것은 다른 목적에 기여하도록 사용될 수 있습니다만 당신이 몸과 동일시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당신에게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내면 음성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고의 음성을 해제하기 위한 수업의 방법은 그것을 성령의 음성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상을 진리로, 어둠을 빛으로 가져가는 수업의 실천 방식입니다. 이것이 용서 과정과 기적의 실천에서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는 분리, 특별함, 판단, 미워함 등의 허상에 불과한 생각인 어둠을 수업에서는 바른 마음이라 부르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용서하는 사랑으로 가져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할이자 예수의 역할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우리에게 허상의 세상에서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든 우리의 에고 생각을 가져갈, 온화하고 지속되는 빛의 현존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입니다. 이것이 수업의 실천을 원리상 매우 단순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분명 실천에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고의 음성을 떠나보내는 데에 대한 우리의 저항이 이 우주만큼이나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에고 없이는 ‘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정 그 자체는 대단히 단순합니다. 당신은 성령이나 예수 혹은 당신을 평안케 하는 에고 아닌 상징이 내면에 있음으로, 하루를 지내며 마음이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특별함의 생각을 그 현존에 가져갑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판단, 불쾌함, 분노, 특별한 사랑, 특별한 증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만들어놓은 문제, 당신이 과거에서 계속해서 끄집어내놓는 문제를 경계해야 할 뿐입니다. 우리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괴로워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부모에게로 향하는 무의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비난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난의 손가락은 말하기를, ‘네가 나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라. 네가 나에게 한 짓을 보라. 나는 실패자이다. 나는 결함이 있으며, 열등한 자이다. 불충분하며, 형편없는 놈이다. 나는 지독한 인간이다. 나는 우울하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그저 완전히 엉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당신의 잘못이다!’ 이것이 비난하는 손가락이며, 수업에서 한 구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를 보라 형제여, 나는 그대 손에 죽노라” (T-27.I.4:5), 그리고 또한 교과서 31장 끝부분에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도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네가 나라고 여기는 내가 바로 나이며, 네가 나를 보면 나라는 것 때문에 너는 정죄받는다’ (T-31.V.5:3).
이것이 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면 언제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현재 누구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현재의 누군가 뒤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우리 삶에서 근본이 된 사람은 우리의 부모입니다. 우리의 대본에 그들을 써 넣었고 우리의 극중에 그들에게 배역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매우 건강한 희생양 둘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를 학대하고, 우리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존재입니다. 반복하지만 ‘네가 나라고 여기는 내가 바로 나이며, 네가 나를 보면 나라는 것 때문에 너는 정죄받는다’ (T-31.V.5:3).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허락하는 것은, 우선 에고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고를 듣지 않는다면, 성령에게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선물, 예수의 선물은 우리가 그들에게 가져가는 선물과의 교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선물을 먼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작동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물은 우리 선물의 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헬렌의 산문시 ‘하나님의 선물’에 쓰인 내용 전부입니다. 원래부터 그것은 그녀에게 주는 메시지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는 두려움, 앙심, 미움, 비방이라는 그녀의 선물을 그에게 가져오라고 그녀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그 선물들을 내게 가져오라.’ 결과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죠. ‘대가로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네 발 앞에 놓아두리라. 그러나 네가 나에게 너의 선물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선물들을 네게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너의 손이 네 선물로 가득 차 있는 한 네가 내 선물을 받기 위해 손을 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물 The Gifts of God>, pp. 118-19 참조).
그가 그의 사랑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헬렌과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마음 안에 내 사랑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일부러 의도적으로 목적을 갖고 네 마음을 소란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내가 사랑을 네게 줄 수 있기에 앞서 너는 우선 내게 그 모든 난장판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인 수준에서 바꿔 말한 것이, 우리가 예수와 함께 혼란을 바라볼 때 예수에게 혼란을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선물을 가져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을 가방에 집어넣어 그에게 그것을 가져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죄책감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의 귀를 통해 경청하고 그는 과거의 음성, 미움, 상실, 고통, 상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돕습니다. 이런 소리들, 다시 말하면 사실은 한 음성인데, 이런 소리들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동기를 유발하고 지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조차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업의 학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성령이며 모든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모든 이를 용서한다, 성자단을 하나로 본다, 우리는 희생자와 가해자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실 세상이 없으며 이것은 모두 하나의 허상이다라고 자동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하나의 가족이야. 그러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져요!
그것이 기적수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님을 잊습니다. 수업은 우리의 두려움, 특별함, 판단, 증오, 상처와 고통을 바라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그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그 고통을 해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따온 아름다운 문구에 기반한 연습서 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모든 눈물을 닦으시리라” (Rv 7:17; W-pII.301).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내시는 길은 우리가 그것들을 그분에게 가져감으로써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행복하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언제나 성령이 당신을 안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수업은 분명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업은 그런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수업은 당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배우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행복한 학습자’(T-14.II) 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직 그럴 때 당신은 비참함과 고통을 치유하고 눈물을 닦아낼 사랑으로 그것들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우선 당신 에고의 음성을 그분에게 가져가기 전까지는 당신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일상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에게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성령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이 모든 쓰레기, 이 끔찍한 것들을 그에게 가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지도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져가고 있는 것은 우리 죄책감, 자기 증오, 판단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고 말하는 한 생각에 기반을 둡니다. 예수는 분리가 없고, 죄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죄의 책임도 없고 판단이나 증오의 면에서 투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 주고 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허상입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고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가 수업에서 말하기를, 그렇게나 적은 것을 우리에게 청하며 그렇게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를 우리가 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T-20.VII.I.1:7-8). 수업이 청하는 전부란, 우리가 우리의 허상을 모든 것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들 허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들 허상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특별한 정체를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움, 자기 증오는 너무도 거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성령에게 준다면 그를 압도할 것이라고 느낍니다. 실제로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강렬한 격분과 미미한 짜증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허상에 서열이 없음을 압니다. 성령은 실재와 허상 사이에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고를 예수에게 가져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그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는 의미이며 벌어지는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저항을 해제하는 과정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에고, 우리의 특별함, 우리의 죄책, 증오, 공포를 깊이 마음에 새겨놓아, 이 모든 것이 너무 엄청나서 절대 지워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물에 대해 말하는 다른 방식은, 우리가 예수에게 가져가는 에고라는 선물은 사실 그를 신뢰한다는 선물입니다. 이렇게 그에게 말하는 것이죠. “당신이 공격받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당신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이것 때문에 다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선물이란 우리의 쓰레기로도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업에서 언급된 탕아 (T-8.VI.4 참조)는, 돌아올 때 그 아버지의 보물 전부를 탕진했다고 알고 있는 아들의 죄책감에 대한 아주 적당한 예입니다. 그 일에 대한 죄책감은 사실 우리가 저질렀다고 믿고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분명 예수는 수업에서 그렇게 말하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보물을 탈취해서 그것을 에고로 다 써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우리를 처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화에서는 아버지는 팔을 벌리고 아들을 환영하며 만찬을 벌입니다.
http://www.facim.org/online-learning-aids/excerpt-series/the-inner-voice/part-iv.aspx
Foundation for A Course in Miracles - Excerpt Series
Our website presents excerpted material from our books and tapes, which discuss different aspects of the Course's thought system.
www.facim.org
[출처] 내면의 음성 IV (강연 발췌) (기적수업 한국 모임) | 작성자 이우형
[출처] 내면의 음성 IV (강연 발췌) (기적수업 한국 모임) | 작성자 라라라루루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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