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상승

자아의 세 측면

빛몸 2019. 12. 16. 10:59


얼마전 자아를 사과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과를 속만 사과라 부르는 게 아니고

그 껍질 또한 사과의 일부인 것과 같이

생각의 차원에서 밝혀지는 내 모습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의 일부인 것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가 켄 윌버의 저서에서

더 확대된 모습으로 찾아왔다.

 

켄 윌버는 자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하였다. 에고적 자아, 실존적 자아,

그리고 정신적 자아가 그것이다.

 

사과의 비유에 접목시킨다면

에고적 자아는 껍질이고, 실존적 자아는

사과의 속이며, 정신적 자아는 씨앗 안에

담겨 있는 생명력으로 연결된다.

 

 

단, 이 비유에서 몇 가지 유의할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과는

껍질을 깎아놓으면 어떤 품종인 지

알 수 없는, 그 속은 모두 동일한 사과이다.

 

또, 씨앗만 땅에 심으면

새로운 사과나무로 자랄 수 있는 사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적 자아 대신에

신(神)적 자아라는 표현을 쓸 것이다.

내 생각엔 그것이 더 적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켄 윌버의 저서를 앞부분만 조금

읽었기 때문에 여기서 꺼내는 이야기가

그가 말한 내용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럼 이 비유를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사과의 껍질을 보고

그 사과가 어떤 품종인 지 판별한다.

후지, 부사, 홍옥 등 다양한 품종이 있다.

 

사과가 잘 익었는 지 그렇지 않은 지도

알 수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어느 과수원에서

재배한 사과인지까지도 알아낸다.

농약이 묻었는 지, 잘 씻겨 있는 지 이런

자잘한 정보들도 사과 껍질을 보면서 알게 된다.

 

이렇게 사과의 껍질은 일전에 표현한 대로

사과의 일부이다. 그리고 사과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사과의 껍질은 에고적 자아다.

 

각각의 사람들마다 각기 달리 주어진

지능, 성격, 가치관, 생활여건 등이 바로

사과의 껍질이다.

 

에고적 자아를 통해서 본인의 개성을 알 수 있다.

삶에 적응하는 방법을 느끼게 된다.

건강한 에고는 조화와 화합, 적응과 의미를

성취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에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종교적, 철학적

입장이 있다.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에고는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어쨌거나

현실의 구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현실과 구체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의 강력하고 정교한 체계는

자아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면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지대이다.

 

 

또다른 지지대는 실존적 자아이다.

 

사과의 껍질을 깎아내고 나면

다른 사과와 똑같이 생긴 사과 속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에고를 벗고 나면 모두가

실존이라는 대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존의 형태는 사람마다 차별이 있지 않다.

 

실존적 자아는 간단히 말해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선과 악, 발전과 퇴보와 같은

의식적 판단이 허용되지 않는

순수한 형태로서의 에너지이다.

 

"나"라는 마음상태를 경계막으로 갖는다.

 

이 "나"라는 마음상태 때문에

나와 너, 나와 세상, 나와 저것이

분별이 된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다는 느낌을

항상 전해준다.

 

실존적 자아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을

열반이나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있겠다.

 

실존적 자아가 사라질 때

그 때 나는 없다. 세상은 있고,

피부가 어디 닿아있는 느낌은 있으나

세상을 보고 있던 나는 없어진다.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욕망도 없다. 들숨과 날숨도

바람이 어떤 곳을 통과하는 것일 뿐이다.

 

실존적 자아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존적 자아는 세상과 "나"의 경계를 생성하여

본인에 대한 뚜렷한 존재감을 갖게 해주는 기반이다.

만약 실존적 자아가 없다면 세상과 나,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생의 많은 부분은 망가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 지지대는 신적 자아이다.

 

신적 자아, 말 그대로 신(GOD)의 에너지로서의

자아이다. 신의 에너지는 창조하는 힘이며 불멸의 기운이다.

 

사과껍질을 심어도, 사과 속을 심어도

사과나무가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반드시 사과 씨앗을 심어야 싹이 난다.

 

하지만 사과 씨앗 자체는 사과 속의 일부일 뿐이다.

신적 자아에 해당하는 사과의 부분은

사과 씨앗이 싹으로 커나가게끔

씨앗 내부에 새겨져 있는 질서, 체계, 정보의 의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죽어 씨앗과 사과 속을 다 이 세상에

놓더라도 신적 자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신적 자아가 사라지지 않기에

이 신적 자아를 통해서 다시금

실존적 자아와 에고적 자아가 형성된다.

 

이른 바 환생이라 부르는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때로는 한 생을 마감하면서 다음 생으로 연결되지 않고

자아가 사라지는, 즉 해탈에 이르는 수도 있다.

혹은 보다 큰 존재에 합일됨으로써

자아가 사라지는 유형도 있다.

 

대부분은 본인이 원하는 세계에서

재차 태어나게 된다.

 

대신에 그런 곳에서 태어났을 때에도

수명은 있다. 비자발적으로 영원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사후세계에 대한 내 관념은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은 추론이긴 하다.

어차피 모든 종교가 추론이라는 점에서

증명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일 수도 있다.

 

겨우 7~80여년의 짧은 삶 때문에

영원토록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는 교리는

가장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간절한 수행과 참선이 있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도

존재의 자유로움을 생각할 때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후세계에서 또다른 삶을 스스로 결정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선택권을 갖는다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무한한 자유이다.

 

여하튼 이 부분은 이만 접는다.

 

 

 

사과의 비유로 돌아가보자.

 

사과에는 껍질과 속,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유전정보 모두가 필요하다.

 

그 모든 게 갖춰져야 사과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자아도

에고적 자아, 실존적 자아, 신적 자아 모두가

갖춰져야 자아인 것이다.

 

그건 자아의 삼등분이 아니라

자아의 세 측면인 것이다.

 

한 자아의 측면이 다른 측면보다

높고 낮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과의 가장 큰 존재 이유가

새로운 생명 창조에 있듯이

 

자아에서 불멸을 이루는 측면은

신적 자아의 면이긴 하다.

 

 

오늘 쓴 내용은 아직 진행중인 생각들과

예전의 경험으로 구성한

이야기로, 앞으로 변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지금까지 보아온

자아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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