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4
분명히 하느님과 교신하는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일은, 당신 자신의 ‘육체’를 얼마간 “잊고”,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생각이라도 멈춰 버리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제로 상태의 고요함[zero stillness]’ 속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이 가진 ‘감각의 전원’을 꺼버리고, ‘감각’과 관련된 것인 한, 스스로를 마치 ‘진공상태’처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정신적으로 ‘빛[the Light]’에 이르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램을 당신이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하기’를 멈춘 상태에서 그러한 바램이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말’없이 행하는 일입니다. 이를 한 번 실천에 옮겨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저메인, 그게 당신한테는 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려면, 아마도 녹음 테이프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이것을 가이드로 삼아, 명상을 시작할 때 사용하도록 하는 편이 더 나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사실 우리는 지금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그러한 방식도 고려해 볼 것입니다. 하느님과 교신하는 두번째 단계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렇게 이르게 된 상태에서, 그냥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이 순간 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나는 당신들이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자기 자신’을 ‘잘라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특히 처음 명상을 시도해 본다면, 생각을 멈춘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당신은 아마 더 역동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편안한 상태에서, 생각들이 떠나가 버리기를 “허락”해야 하는 것입니다.—생각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지금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에 집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한 번 시간을 내어서, 편안한 마음을 갖고—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이를 한 번 실천에 옮겨 보십시오. 당신이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당신의 ‘마음’이 이에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편안해 지기를 바란 다음, 명료함과 이해력을 가지고,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깨어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이를 참았다가 (약 6초 정도), “나는 고요한 상태 속에 있다.”는 자기 암시를 반복해서 주면서, 숨을 천천히 내 쉬어 보십시오. 이렇게 세 차례 정도 해 본 다음, 당신의 ‘내재적인 마음[inner mind]’이 ‘편안해지고[to remain relaxed]’, ‘수용적이 되도록[to remain receptive]’, 안정을 취하십시오. 그리고는 이어지는 편안한 호흡들 속에서, 당신은 자신을 점점 더 수용적이며, 편안한 상태 속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당신이 죽 따라해 보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 우리가 다르마[Dharma]와 함께 간단하게 만들었던 명상 테이프라도 한 번 들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어쩌면 이 테이프는, 당신 스스로를 깨끗이 하고, 또 어두운 에너지를 없앨 수 있게 하여, 당신이 아주 편안하게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읽고 쓰는’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벌써 이 테이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는, 이 테이프를 듣다가, 당신들이 그저 잠들어 버려서, 편안함을 취하긴 하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면, 명상을 하는 시간은, 당신이 안고 있는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도 아니며,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세상에 대한 걱정도, 또는 그 밖의 어떤 걱정거리라도,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할애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 당신은 마치 온 세상이 이미 완벽한 상태 속에 있는 것처럼 여길 필요가 있고,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명상이라는 ‘게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 처음 당신이 느끼게 되는 것은, 육체적인 안정감과 더불어, 다소간의 ‘내재적 안정감[inner relaxation]’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 ‘하느님의 생각[the thought of God]’에 접촉해 보려는 바램을 가진 상태로, 다음 사항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그러기에, 그 분은 ‘영구적인 우주적 기쁨[perpetual universal joy]’입니다.—당신은 바로 그 분과 동일한 패턴의 진동수에 이를 수 있게 되길 바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새로 나온 캘리포니아산 “스낵”이나 음미하면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환경을 파괴시키는 유독성 폐기물들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잠시만이라도 떠나보내십시오. 핵무기에 대한 염려도, 굶주리는 아이들에 대한 근심도, 잠시만 잊어 보십시오. 당신들은 바로 ‘창조주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없는 한, 이 같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 분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만,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같은 안정의 시간을 갖는 동안 일종의 평화와 고요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재적 기쁨의 상태’가, 점점 더 당신 삶에서의 ‘즉각적인 반응 양상’ 속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이 같은 명상의 기회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당신이 평소에 보이게 되는 성품도 점점 더 이 ‘내재적 평화’를 닮아갈 것입니다. 당신이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상태는, 공포나 화, 낙담, 열등감, 부러움, 또는 질투와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킴이 없이, 부정적인 영향들을 수용해 낼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단순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들을 바라보십시오.—왜냐하면 당신은 이성과 통제력을 갖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공포나 기타의 감정들에 기반하여 반응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완전히 ‘순수한 열정과 에너지[total passion and energy]’의 존재입니다.—그 분은 공포나 화, 낙담 등과 같은 감정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방식 속에서 잠깐의 휴식을 갖는다손 치더라도, 당신이 갖는 고통과 고뇌는 당신으로부터 떠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러한 고통과 고뇌에 당신의 관심의 “초점”을 두길 멈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당신이 이 문제들을 당장 바꿀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 현존하는 문제들이 떠나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들’도 어쩌면 저마다의 고뇌를 안고 있을 것이라는 여유로운 생각 속에, 이 문제들을 다뤄야 하는 것입니다.—이러한 생각은, 당신만이 고통을 다 떠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보다가는, 당신이 그저 다수 중에 한 명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 줍니다.—사실상, 다른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당신이 그 당사자의 고통을 깨달아 느끼지는 못합니다.—물론 당신은 당신만의 고통을 갖고 있긴 하겠지만, 실상은 그러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재해 계신 하느님[God within]’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함에 따라—육체적인 불편함이나, 혹은 당신이 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불공정과 같은 것들에 대한 초점은 흐려지고, 이 같은 왜곡된 현실들이 그저 다소간의 핸디캡 정도로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걸을 수 없다고 해 봅시다.—하지만 그 때에도 하느님은 항상 당신의 손과 두뇌를 필요로 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하느님과의 균형 속으로 보다 깊이 나아감에 따라,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신적인 측면들이 될 것입니다.—육체적인 욕구와 관련된 다른 사안들은,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약화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로 발견하길 원하는 한, 얼마든지 발견하게 되겠지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과 근원과의 연결[THE MIND CONNECTION TO SOURCE]’이라는 문제 밖에 없습니다. 육체와 같은 것들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여러 개의 “만약”이라는 단서를 다는 일 없이, 정확히 있는 그대로. 왜냐하면 당신은 현존하는 당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같은 평화를 허락해 줄 수 있는, ‘안정의 상태’인 것입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 긴장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안정은, 단순히 당신 마음 속의 ‘광기’를 멈춰버리는 것에서 오게 됩니다. 이 ‘광기’를 바로 한가지에 대한 바램—즉, 내적 기쁨—으로 대체시키는 것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정은, 즉각적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따른 어떠한 육체적 고통이라도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과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그 과정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도 더해 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떤 문제에 대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바램을 마음 속에 가져 보십시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바램에 ‘형태’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나아가 만약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바라고, 자기 자신은 이 ‘요구의 목록’의 맨 마지막에 두게 될 때, 오직 예외가 있다면, 당신이 타인을 위한 보다 나은 봉사를 하기 위해서일 경우에만 자신을 앞세우게 될 때,—그 때 당신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이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또한 자아중심적인 에고에 기반한 “자신”[ego self-centered “me”]으로부터 초연해진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이 글을 읽고 넘기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당신은 이를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당신이 가진 시간을 죄다 할애해서 그렇게 하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아주 실체적이고, 물리적이며, 또한 의식적이기도 한 방법에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그건 바로 문제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문제’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답’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될 일이란, 오직 문제를 제자리에 ‘정위치시키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이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당신의 “근심”을 멈춰줄 수 있는 모든 측면들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해결책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걱정하는 것’은 해결을 ‘막는 일’이 될 뿐입니다.
명상의 정의
명상이란, 인간이 자신 속에 내재해 계신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바램이며, ‘자신의 생각[his thinking]’을 통해, ‘자신의 앎[his knowing]’을 확장시켜, 자신 속에 있는 ‘하느님의 앎[God-awareness]’을 현현해 내는 것입니다.—자신의 영감에 찬 상상이 만들어 내는 모습들 속에서, 자신에 의해 창조되는, ‘물리적인 것들’을 생성해 내는 일입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다 단순화시켜 봅시다. 명상이란, 홀로 머물러, 하느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명상은 ‘당신의 영혼[YOUR SOUL]’과 ‘우주적 영혼[THE UNIVERSAL SOUL]’간의 진정한 회합인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된다 함[To be one with God]’은 ‘그 분의 지식[His knowledge]’과 ‘그 분의 권능[His power]’을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곧 ‘당신의 마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당신이 당신 자신 속에서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는 만큼, 또한 그 분과 당신간의 하나됨에 대해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만큼, 바로 꼭 그 만큼, 당신은 ‘하느님의 모든 지식과 권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갖고 계신 지식이 당신 자신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면, 당신은 이를 일깨워야만 할 것이고, 그렇게 할 때에 당신은 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자신이 이를 이해하는 역량만큼, 이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우주적 법칙 전체[The entirety of Universal Law]’는,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명령에 따라,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들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 같고, 또 좀 진부한 것으로 여겨졌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려볼 수 있도록, 내 말을 좀 더 계속해서 들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당신이 완전히 안정된 상태로 접어들게 되면, 당신이 가진 단점들이 전부다 노출될 것이라 여겨 이를 두려워합니다.—그렇지만 하느님은 당신이 가진 결점들에 대해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명상을 통해 당신이 가진 단점들에 정말로 직면해야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그 두려워하는 일이란 더 이상 당신에게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주어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직접 당신에게 이를 끌어 당겨 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의 초점은 하느님과 교신하는 것이지, ‘더러워진 빨래감들’을 세탁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당신의 ‘앎과 이해[awareness and understanding]’의 폭만큼, 오직 꼭 그 만큼, 당신은 ‘우주적 권능[universal power]’을 이용하여 당신의 앎을 물질화된 형태로 생성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앎[Your KNOWING]’이 바로 당신의 ‘마음-자아[MIND-Self]’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자아’가 바로 ‘영원한 존재[the eternal Being]’이기도 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의 자아[Your SELF]’가 당신의 육체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앎’이 당신의 두뇌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바로 ‘당신의 앎’은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당신의 육체와 당신의 두뇌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your Mind]’과 ‘당신의 두뇌’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두뇌를 통해서 생각하고, 당신의 두뇌와 더불어 생각합니다. 마치 지렛대가 지레의 받침대를 통해 작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이 작용 메카니즘에 대해서 설명한 앞선 저널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의 두뇌는, ‘의식[Consciousness]’을 통해, 두뇌로 확장되는 명령을 수행해 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의식’이 ‘마음[Mind]’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의 두뇌는, 마치 축음기가 그러하듯이, 기억과 경험과 정보들을 전기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두뇌로부터 나오는 전기적 메시지에 따라, 당신의 육체가 이에 복종하도록—자동차를 제어하는 것이나 꼭 마찬가지로—명령을 내리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갖는 의지[the will of your mind]’인 것입니다. 당신 체내의 신경들은, 당신의 육체라는 전기적 기계 속의 “전선들”입니다. 두뇌는 오직 신경 기록체[recorder]이자 신경 분배 매체[distributor]일 뿐입니다.
당신의 ‘우주적 앎[cosmic knowing]’의 폭은 바로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앎[God-awareness]’의 폭입니다. 이것은 ‘전지의 빛[the Light of all-knowing]’ 속에 머무는 ‘당신의 역량의 폭’이자, 하느님과 함께 ‘창조의 생각 우주[the thought universe of Creation]’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당신의 역량의 폭’인 것입니다.
‘상상된 형태[imagined forms]’를 통해 ‘당신이 아는 것을 생각하는 일[Thinking what you KNOW]’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우주[the invisible universe of Mind]’ 속에서, ‘당신의 영구적인 자아[your eternal Self]’를 표현해 내는 일인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일[following up your thoughts with actions]’을 통해, ‘상상된 생각-형태[imagined thought-forms]’에 ‘형상화된 육체를 주는 것[Giving formed bodies]’은, 바로 ‘보이는 물질의 우주[the visible universe of matter]’ 속에서, ‘당신의 영구적인 자아[your eternal Self]’를 표현해 내는 일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분은 바로 ‘자신의 전기적인 육체[His electric body]’를, ‘그 절대적인 주인[its absolute master]’으로서 통제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상호작용들과 상호교환들을 절대적인 균형 속에서 유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영원히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바램이 갖는 상상 속에서 창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러기를 바라는 한, 당신 역시 마찬가지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서 일할 때, 그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권능을 아는 범위만큼, 당신 육체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또 밤부터 이어지는 아침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육체적 행위’ 사이에, 끝없는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대신, 이들이 균형 속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긴장과 스트레스, 공포와 근심, 그밖의 여러가지 감정들은 독성을 축적하여 당신의 몸을 파괴시키게 됩니다. 당신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아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정확히 당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이 저지르는 잘못된 행동들에 대한 대가를 끊임없이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창조
이제 우리는, ‘마음’과 ‘물질’에 관련한, 여러가지 혼동스러운 문제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 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해서, 당신이 이를 이해하는데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은 영적인[spiritual]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원인의 우주[the INVISIBLE universe of CAUSE]’를 구성합니다.
물질은 물리적인[physical] 것으로서, ‘보이는 결과의 우주[the VISIBLE universe of EFFECT]’를 구성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의 생각[ONE IDEA]’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생각, 그 전체가, ‘창조[CREATION]’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바램[ONE DESIRE]’만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이 바램이, ‘그 분의 하나로서 전체인 생각[HIS onE WHOLE IDEA]’에 ‘창조적 표현력[CREATIVE expression!]’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고[thinking]’와 ‘상상[imagining]’을 통하여 자신의 바램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냅니다.
하느님은 ‘우주적 영혼[the Universal Soul]’입니다. 하느님의 사고와 상상이, 자신의 영혼을 현현시키는 육체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육체가 바로, ‘전체로서 하나인 빛과 파동의 우주[THE LIGHT-WAVE UNIVERSE AS A WHOLE]’입니다.
‘하느님의 하나의 생각[God’s one Idea]’은, 그 분의 사고와 상상을 통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수백만개도 넘는 사고의 단위들로 분리되는 것이며, 그 각각의 ‘개체적 사고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의 육체들을 갖게 되지만, 제 각각의 확장을 통해서 그들 전체가 표현해 내는 것은 바로 ‘하나[the onE]’입니다.
이 광대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이란 오직 ‘움직이는 육체들[moving bodies]’일 뿐이고, 이 육체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마음[Mind of God and man]’이 갖는 사고에 그 중심을 둔, ‘영혼의 우주적 빛의 고요함[the stillness of the cosmic Light of Soul]’으로부터 확장된 것입니다. 형태를 갖는 모든 육체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마음-상상[mind-imaginings]’에서부터 하느님과 인간을 표현해 내기 위해 확장된 것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 보게 되면, 정말이지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조주와 창조는, 단지 상상하는 저마다의 존재들이 갖는 상상들 속에서, 다채롭게 채색되고, 또 ‘빛의 스펙트럼으로 형성된 육체들[light-spectrum-formed bodies]’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역동적으로 확장된, ‘상상의 마음이 갖는 형태들[mind-imagined forms]’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온 우주는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육체[one Mind, one Soul and one Body]’지만, 겉보기에 ‘많은 마음들과 많은 영혼들과 많은 육체들[many Minds, many Souls and many Bodies]’로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인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존재들의 하나됨[the onENESS of all things]’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이해에 이르는 ‘길’로서, 당신은 ‘하느님과 그 분의 육체[God and God’s body]’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정말로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터득하게 되면, 그 때 당신은 이 우주에는 그 어떠한 것도 두 개로 분리되지 않으며, 또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와 더불어, 당신은 당신이 바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당신으로부터 확장된 것들이자, 동시에 저마다로부터 확장된 것들로서, 바로 ‘하나[the onE]’로부터 확장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들은 모든 것들 속에 그 중심을 잡고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제 각각은, 모두 다 전체 우주의 중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명상 속에서 ‘인간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이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 자각이란,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경이로운 일입니까! 또 그 같은 자각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창조도, 하느님이 만들어 내는 창조와 꼭 마찬가지로, ‘균형된 리듬감과 대칭성과 안정성[the balanced rhythms, the symmetry and the stability]’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란, ‘생각들[ideas]’을 ‘사고의 형태[thought-forms]’ 속에서 생각하여, ‘자신의 육체[His Body]’로부터 이 ‘생각들’에 ‘육체들[bodies]’을 건네주는 것이자, 또한 ‘자신의 영혼[His Soul]’으로부터 이 ‘생각들’에 ‘영혼[soul]’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생각할 때, 바로 하느님의 상상된 이미지 속에서, 인간의 육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으로, 장미꽃도, 숲 속의 떡갈나무도, 개미도, 도마뱀도, 코끼리도, 말도, 행성도, 태양도, 대양도, 바다 속을 헤엄치는 모든 수생 생명체들도,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형태의 육체를 가진 존재들 모두도, 저마다 분리된 ‘생각들[ideas]’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로부터 확장된 것들이며, 모두가 서로서로로부터 확장된 것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또 다른 특별한 ‘생각들’은 비행하는 존재들로, 이들 날개를 가지고 자유와 완벽함을 구가하는 생명체들은 약동하는 대기 속의 ‘전기적 파동[the electrical waves]’ 위에 올라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날개를 가진 생명체들은 당신과 우주 속에 반짝이는 별들을 연결시켜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비행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당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한 번 추측해 보십시오!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이기도 합니다! 인간 역시 ‘생각들[ideas]’을 ‘사고의 형태들[thought-forms]’ 속에서 생각하여, 이 ‘생각들’에게 ‘우주적 육체[Universal Body]’로부터 ‘육체’를 건네주고, ‘우주적 영혼[Universal Soul]’으로부터 ‘영혼’을 건네 주는 것입니다. 엔지니어는 다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데, 이 때 형태를 갖춘 다리의 모습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미 존재하는 부속품들과 조각들을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적절한 부품들이 제대로 맞물린 다리를 완성해 내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는, 다리를 올리고 내리는 데 쓰일, 공학적인 지렛대의 원리를 여기 더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두고 당신들은 ‘건설’이라 부릅니다!
작가들은 무수히도 많은 단어들을 종이 위에 펼쳐내고, 이를 잘 엮어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이 역시 ‘생각의 표현[expression! of idea]’인 셈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음악가들은 자신의 상상 속의 고요함 속에서 곡조를 생각해 내고, 그 상상을 반영해 주는 음조들로 구성된 소리를 엮어 내어, 형태를 갖춘 모습으로서의 ‘음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같은 음악은 ‘생각[idea]’의 ‘원초적인 고요함[the original silence]’으로부터 확장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이 하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다양한 것들 가운데서 ‘상상된 형태’를 먼저 생각해 낸 다음, 당신의 상상 속의 이미지에 따라, 이 ‘생각들’에 ‘형상화된 육체[formed bodies]’를 부여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천재성을 일깨우십시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단한 천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 역시 이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그와 똑같은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증거를 여태까지 보여주지 못한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직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아직 ‘당신의 자아[your Self]’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천재들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그 신성한 불꽃[that divine spark]’은 당신 안에도 내재해 있습니다. 영감[inspiration]과 깊은 명상[deep meditation]을 통해서 당신도 당신 자신의 불꽃을 당겨줄 수 있습니다.—아니면 차라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당신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당신의 자아’를 발견해 내는 일입니다. 바로 ‘당신의 자아’ 안에 내재해 있는 ‘신성한 권능[the divine power]’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잘 모르고 있을지라도, 실상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이 ‘무한정한 지식[unlimited knowledge]’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당신이 특별히 어디를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고, 또 특정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거기 있어 왔습니다.—당신은 당신이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항상 집착해 왔지만, 실상은 단순히 그걸 피해 늘 도망다녀 왔던 것입니다! 당신들 대부분은 자아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 처음부터 겁을 집어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당신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영원한 “탐색”[the forever “searching”] 상태 속에 머무는 것에서만 커다란 안정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변명’이 될 뿐입니다.
당신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이 놀라운 일을 당신이 아직까지 해내지 못한 이유들 가운데 한가지는, 바로 명상이 아직도 서구인들에게는 상당히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설령 당신이 당신의 천재성을 발견하더라도, 당신이 찾아낸 것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만을 추구하려고 드는 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불명예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어떠한 일을 행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의 영혼 속에 내재해 있는 것’[within the Souls of all men]을 영원히 부르는 목소리, 이 “영혼의 내재적 목소리[Inner Voice of the Spirit]”가 만들어 내는 끊임없는 박동은 계속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물질적인 것들에 얽매여 너무나 바삐 살아 가기에 이 목소리를 들을만한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은 당신의 육체가 만들어 내는 감각과 또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요구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내재적 목소리[your Inner Voice]’를 듣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육체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 때 바로, ‘하느님의 전능과 전지의 우주[God’s omnipotent and omniscient universe]’가 만들어 내는 높은 천상의 공간은 당신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의식의 새벽에[at the Dawn of Consciousness in the human race]’, 인류가 처음 ‘생각을 하기[thinking]’ 시작했을 때, 그 때 명상도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회합 속에 늘 있어 왔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갖지 못했습니다.—하느님은 인간들 곁에 늘 현존해 계셨던 것입니다. “의식의 새벽”에 인간이 감각과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한은, 계속 그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고하고[think]” “알기[know]”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초월적인 존재[a superior Being]’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숭배는 그 때 시작되었습니다. ; 태양 숭배, 우상 숭배, 그런 다음 마침내, ‘사고하는 인간의 내재적 목소리[the Inner Voice of thinking-man]’는, 여러가지 신들과 같은 보다 영적인 개념에 대한 숭배로 인간을 이끌어 갔고, 결국엔 ‘하나의 하느님[One God]’에 대한 숭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명상을 통해서, 혹은 인간의 육체적인 감각과 정신적인 영감 사이에 발생하는 교감을 통해서, 몇몇 천재들은 다른 이들을 능가하는 어떤 것들을 펼쳐 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전개는 여러 시대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제 오늘날의 인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 “우주적” 시대의 새벽[the dawn of the “Cosmic” Age]을 펼쳐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우주적 앎[cosmic knowing]’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수 천명의 사람들만이 ‘생각-마음[thinking-Mind]’의 ‘이 보이지 않는 우주[the invisible universe]’에 대한 ‘새로운 지식[new knowledge]’에 대해 준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우주적 인간[cosmic man]’으로 변모될 ‘새로운 인류의 씨앗[the seed of the new race]’으로 자랄 수 있을만한 소양을 갖춘 사람들도 불과 수백만명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도래하게 될 이 아름답고 지성적인 시대란!
인간 의식의 전개 과정 상에서 이처럼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숫자를 가늠해 보는 것은 전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약 8백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있다고 해 봅시다.—뉴욕이나 시카고, 또는 로스엔젤레스와 같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약 2만 5천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고차원적이고 영적이며 리듬감있는 창조[the higher inspirational rhythmic creations]’의 상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향해 울려 퍼지는 ‘자연의 심장 박동[the heartbeat of Nature]’을 해석해 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이 세상의 위대한 천재들이 갖게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들은 가능하다면, 소음을 일으키는 군중들과 멀어지려 할 것이며, 하드록 음악의 소음에도 난감해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귀와 영혼에 와 부딪히는, ‘음악없는[musicless] 음악’의 시끄러운 ‘소음’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들은 혼자 있을 수만 있다면, 숲 속이나 바닷가에서 홀로 머물기를 추구할 것이며, 이러한 장소에서, 이들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침묵의 속삭임[nature’s silent whisperings]’을, 그리고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들려오는 리듬감 있는 소리들[rhythmic sounds within their very Souls]’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백만명 가운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의 속삭임으로부터 지루함 이상의 그 어떤 다른 의미도 발견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바닷가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산책로를 따라 거닐며 듣게 되는 자연의 가식 없는 소리들은 이들의 육체가 갖는 감각에 유쾌한 진동을 불러 일으켜서, 오직 이들에게만 흥분된 느낌을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그들의 삶을 제어하는 데에 있어서, 아직도 ‘육체-앎’에 의존한 감각적 존재로서의 삶에만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 일반인들에겐 흥분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폭력’과 같은 것에 노출되는 일이, 이들에겐 오직 지루함만을 점점 더 깊게 만들어 줄 뿐인 것입니다. 이는 ‘의식의 새벽[The Dawn of Consciousness]’이 아직 그들에게 ‘빛[The Light]’을 비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 ‘빛’은 ‘그들 영혼의 깨어남[their Soul’s awakening]’을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우주적 시대의 새벽[THE DAWN OF THE COSMIC AGE]
‘깨어난(계몽된) 자들[Those illumined]’은, 이제 ‘그들의 영혼의 문[the doors of their Souls]’을 활짝 열어 젖혀, 온 인류가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준비된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볼 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그러한 자들의 수가 증대되어 참된 우주적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평균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앞서서 깨어나는 것입니다.—나는 지금 결코 “뉴 에이지[NEW AGE]”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당신들이 믿어 주었으면 합니다! 바로 이 자들, 깨어나고 계몽된 자들, 이들이 인류의 영적 역량을 영원히 펼쳐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종교인과 같은 모습도, 독재자와 같은 모습도, 지배자와 같은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정상적”이거나 “보편적”인 모습, 또는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앎—상상—사고—생각[KNOWING—CONCEIVING—THINKING—IDEA]
‘창조’는 ‘하느님의 하나의 생각[an IDEA of God]’입니다. ‘사랑’이 바로 ‘그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the one whole Idea]’인 것입니다. 그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이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what God knows]’를 구성합니다. 하느님은 ‘그 하나의 생각’을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를 가진, 셀 수 없이 많은 부분들을 통해, 사고해 내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사고[God’s thinking]’는 ‘하느님의 앎[God’s knowing]’을 분리시켜, 겉보기에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생각들[ideas]’을 펼쳐 내고, 그 제 각각에게는 ‘분절된 형상들’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당신이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완전히 깨어났을 때, 당신은 ‘하느님의 앎의 전부[all of God’s knowing]’를 다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개 당신이 하느님과의 회합을 매번 가질 때마다, 당신의 영혼은 이 ‘우주적 영혼[the Universal Soul]’에 조금씩 조금씩만 더 다가설 따름입니다. 어쨌거나, 그 때 당신은 이 ‘앎’을 떼어내어, ‘객관적인 형태’ 속에 구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 자신의 창조[God’s Creation]’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또한 이것은 ‘당신의 창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감각이 아닌 당신의 영혼으로 갈구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소망하는 바를 항상 얻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말로만 이를 바란다면,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 당신은 하느님께 부탁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 경우 당신은 단지 ‘당신의 감각’에 부탁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당신의 심장 박동’ 속에 당신이 바라는 바를 진정으로 새겨 넣었다면, 변화되는 매 순간 순간을 따라, 이는 당신의 삶 안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앎’을 얻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하시는, ‘리듬감 있는 빛의 언어[the rhythmic language of Light]’를 통해, ‘시간을 초월한 섬광[timeless flash]’을 타고, 전달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소망에 따라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the one whole Idea]’의 일부를 얻게 되었을 때, 당신은 이에 ‘형태’를 부여하는 상상을 통해서, 이를 ‘개념화된 형상’으로 ‘사고’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개념화된 형상’이 처음에는 뿌연 안개나 성운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아직 어렴풋한 상태 속에 머물러 있다면, 이를 가지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마십시오. ‘빛의 제로 상태[the zero of the Light]’로 집중력을 분산시켜 보십시오. 계속해서 그렇게 해 보십시오.—그런 다음에 다시 집중해 보십시오. 매번 새롭게 집중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의 영감에 찬 상상력[your inspired imaginings]’ 속에서 그것이 갖는 형상을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아직 ‘배아 단계[in embryo]’에 머물러 있다면, 이를 굳이 억지로, ‘형태와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객관적인 우주[the objective universe of form and motion]’ 속에, 서둘러 ‘태어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당신의 외부적 조망이 분명해 질 때까지는,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것이 발명에 관련된 문제라면, 당신이 그것을 명확히 볼 수 있을 때까지 이에 대해 숙고해 보십시오. 초기 단계에서 섣불리 실험을 시작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물리적인 행동으로 옮겨서 귀한 시간을 사용하게 되기 전에, 머리 속에서 완전히 이 ‘배아 상태’에 있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지 않고 너무 서두를 경우, 아직 어머니 배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 미숙한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미숙한 결과물을 낳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세일즈의 문제라면, 세일즈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다 함께 모아 본 다음, 그것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을 당신이 분명히 시각화시켜 볼 수 있기 전까지는, 섣불리 고객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것이 심포니의 한 모티브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전에, ‘당신의 영혼이 갖는 침묵[the silence of your Soul]’ 속에서 그것을 우선적으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당신이 바라는 것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물리적인 양상을 부여하기 전에, 그 ‘영적인 형태[spiritual form]’ 속에서 이를 하느님께 의뢰해 보십시오. ‘보이는 상태로[VISIBLY]’ 그것을 창조해 내기에 앞서, ‘보이지 않는 상태로[INVISIBLY]’ 창조해 보십시오. 생각을 시작하거나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빛의 제로상태의 고요함[zero of stillness in the Light]’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만약 당신이, 마침내 당신이 개념화한 것을 물리적인 양상으로 옮기기 시작했을 때, 언제나 당신의 영혼이 ‘우주적 영혼[the Universal Soul]’에 맞춰진 상태에 있도록 하십시오.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상태 속에서 발현되는, ‘내적 자각과 내적 기쁨’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 두십시오. 이 때, 당신의 창조 행위는 훨씬 신속하게 끝내어질 것이며, 당신은 덜 피곤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당신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하십시오. 말없이 표현되지만, 리듬감 있는 하느님의 빛의 언어[His wordless rhythmic language of Light]를 통해 그 분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십시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에고만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일하기를 멈추십시오. 당신의 감각적인 육체가 느끼는 감정들은 이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고, 작업과정 속에 ‘당신의 영혼의 빛’이 개재되어 있지 않은 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육체적 감정들[physical emotions]’은 ‘영적 영감들[spiritual inspirations]’을 즉각적으로 질식시켜 버립니다.
생각[IDEA]의 분리
당신은 시간을 초월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모든 면들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객관적인 형태로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갖는 삼차원적 우주 속으로 확장된 ‘생각’을 분리시켜 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이를 물질적으로 조건지워진 형태 속으로, ‘분리’시키고 또 ‘확장’시켜야 하며, 이를 움직이는 상태 속에 둬서, ‘복합-조건적으로 움직이는 형태[multi-conditioned moving forms]’를 갖는, ‘물리적인 우주[this physical universe]’의 일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창조적인 과정에는 ‘기술[technique]’이 필요합니다.—그렇지만, ‘지식[knowledge]’과 ‘영감[inspiration]’을 얻는 데는 어떠한 기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마음으로 상상된 형태[Mind-imagined forms]’에 ‘육체적인 형태[body forms]’를 부여하여 ‘자신의 우주[His universe]’를 창조하신다는 점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당신이 상상한 형태[your imagined forms]’에 ‘객관적이고 육체적인 형태[objective body forms]’를 부여하여 ‘당신의 우주[your universe]’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상상에 따라 구체화된 형태를 만들어 내기에 앞서, 우선 당신은 “생각[IDEA]”을 떠올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를 객관적인 형태로 생성해 내기에 앞서, 당신은, 떠오른 ‘생각’을 이용하여 당신의 상상을 완전히 펼쳐내는 일을 먼저 수행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만의 상상’이라는 과정을 거친 ‘생각’이 아주 명료해졌을 때, 이를 구체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기술적인 면들을 당신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 때, 창조 작업을 시작하십시오. 이를 ‘창조’해 내면서, 기술적인 면들은 배워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은, 당신의 육체가 터득해 내는 것일 수도 있고, 또 그 누구라도 그것이 어떠한 ‘기술’이 되었건 간에 이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지식’과 ‘영감’은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곤, 오직 이를 일깨우는 일 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란, 이를 일깨우려는 ‘바램[DESIRE]’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이 바램을 갖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이를 하느님께서도 아시도록 만드십시오. 그 때, 당신은 ‘빛의 영광스러운 언어[glorious language of the Light]’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의 영광스런 언어’라는 것 자체가 바로 ‘당신 자신’이기도 합니다. ‘영감’은 그 때 당신에게 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 속에서 당신의 바램은 ‘앎[knowing]’을 통해서—이 앎이 바로 영감 그 자체이기도 한 그러한 앎을 통해서, 완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의 언어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지성의 정수[the essence of Intelligence]’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이 ‘지성[Intelligence]’을 ‘말’로 표현해 내는 것이고, ‘말’이란 오직 한가지의 ‘기술[technique]’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형태’를 당신이 구현해 내고 싶어 하든지 간에, 당신은 ‘이 신성한 빛의 언어의 정수[the essence of that divine language of Light]’를 ‘형태’를 가진 모습으로 ‘번역’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를 구현해 내는데 필요한 ‘매개체[medium]’를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매개체를 사용하는 방법은 ‘기술[techinque]’의 습득으로 해결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의 육체가 ‘당신의 의지[your will]’에 따라 행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지를 통해, 당신의 육체에게 명령을 내려, 당신의 ‘바램[desire]’을 표현해 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자동적인 기계가 될 뿐입니다. 모든 ‘표현’의 기술을 습득해 내는 데에 있어서, 육체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 훈련되어져야 하고, 이러한 훈련 과정에는 몇 년이 소요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의지에 자동적으로 순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의 육체가 ‘완벽한 악기’가 되는 데에는, 또는 ‘그림 그리는 도구’가 되거나, ‘글 쓰는 기구 혹은 조각하는 기구’가 되는 데에는 수년에 걸친 연습이 필요한 것이지만, 이는 오직 ‘육체의 확장된 면모들[extensions of the body]’일 뿐입니다.
‘생각[IDEA]’을 착안해 내는 것은 ‘생각의 씨앗[SEED OF IDEA]’으로서 기록됩니다.
당신이 한가지 생각을 착안해 내는 것은, ‘떡갈나무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크게 자란 떡갈나무가 되는 것이나 꼭 마찬가지의 관계를 갖습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은 ‘당신 자신만의 영혼 속에[in your very Soul]’ 기록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의 고요함[the stillness of your Soul]’으로부터, 그 ‘생각’은 형태를 가진 모습으로 확장됩니다. 마치 떡갈나무라는 형태가, 그 본연의 ‘형태없는 씨앗의 고요함’으로부터 확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의 ‘생각’에 대한 착안과, 이에 그 ‘형태와 목적’을 부여하는 상상이 가져다주는 내적 기쁨은, 이를 통한 “창조적” 확장[“created” extensions]이 그러한 것만큼이나, ‘고무적인 일[uplifting]’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당신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목적의식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위한 목적의식을 갖고서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된다면, ‘형태화된 대상’ 속에 불어 넣게 될 당신의 ‘영감에 찬 상상’은 온 인류의 감각에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당신이 ‘물질화된 육체(대상)’를 이와 같은 ‘작용-반작용의 과정’을 거쳐서 창조해 내게 될 때, 이것은 하나의 ‘걸작’이 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순간 하느님과의 교신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그 창조 대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바로, ‘사랑’을 당신의 ‘창조(물)’에 불어넣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랑’을 당신의 창조물로 확장시키지 못하면, 당신은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없습니다.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없거나, 혹은 거기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면, 당신의 창조물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줄 수 있는 생명력이나 사랑을 재전달해 주지는[regive]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경우, 그 창조물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고, 이내 죽은 것들만 담기는 쓰레기 통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걸작’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창조주의 영혼’이 갖는 생명력과 사랑이 ‘당신의 영혼’을 통해 확장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걸작은 ‘당신이 가진 불멸성[your immortality]’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줄 수 있는 ‘재확장[re-extension]’의 기능을 갖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매 순간 순간,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확장[extension of YOU]’임을 기억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육체에게 사랑을 주게 될 때, 육체는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다시 전해 주게 됩니다. 말하자면, 만약 당신이, 당신의 육체를, 쌀쌀한 태도나 비통한 심정과 같은 불균형적인 상태 속에 두게 될 때, 당신의 육체는 당신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을 고스란히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잠시 멈춰서,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육체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만드는 생각이 갖는 의미를 면밀하고도 주의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당신의 육체를 당신 자신이 아프게 만든다거나, 혹은 ‘당신의 거부적인 생각들과 거부적인 육체’가 다른 사람들을 당신으로부터 떠나가도록 만들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종종 이 문제를 다시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이 가져다주는 영광
당신의 역동적인 사고를 깊은 명상 속의 고요함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에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이 존재합니다. 만약 당신이 현실적으로 숲 속이나 바닷가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과 회합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의 상상 속에서 그러한 장소에 가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일상사의 복잡한 문제들이 당신의 생각을 사로잡으려 한다면, 바다가 만들어 내는 상상 속의 소리 속에서 그것들이 떠내려 가게 만들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떠올린 바닷가에서, 해안에 와 부딪히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리듬을 탄 소리를 듣게 될 때, 이는 마치 당신 속에 내재해 있는 ‘우주의 심장 박동[the heartbeat of the universe]’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혹은 당신이, 당신의 ‘내재적인 귀[inner ears]’를 통해, 소나무 숲에 와서 부딪히는 미풍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면, ‘황홀경의 영광[the glory of the ecstasy]’은, 이내 ‘세속적인 생각의 찌꺼기들’이 모두 떠내려가 버리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명상은 물질적인 것들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의 감각적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떼어 내어, ‘우주적 상상의 공간’으로 당신을 데려 갈 것입니다. 명상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떠들썩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떼어 내어, 육체 밖에 존재하는 ‘리듬감 있는 침묵의 세상[the world of rhythmic silences]’으로 당신을 데려 갈 것입니다.—이 곳은 영혼의 세상이자, 당신을 통한 탄생을 기다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의 씨앗[the seed of things unborn]’의 세상인 것입니다. 당신이 갖는 상상의 세상은, 여러가지 감정들과, 그 감정들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혹은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로부터 당신을 떼어 내어, ‘당신의 영혼이 머무는 높은 천상의 황홀경[the ecstasy of your Souls’s high heavens]’으로 당신을 데려 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균형을 되찾는 ‘우주적 방법[the cosmic way]’인 것입니다.
지구상의 음악은 멜로디를 가지고, 당신을 지구에 묶어 둡니다. 하지만, 당신의 내재적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영역[spheres]”에 존재하는 “음악”은 깊은 음조[deeply tonal]를 갖지만 멜로디는 갖지 않습니다. ‘자연의 음악[Nature’s music]’이 만들어 내는 ‘리듬과 톤[rhythms and tones]’은 ‘빛의 언어[the language of Light]’ 속에 존재하는 옥타브 상에 구현되는 것으로써, 그 속에는 항상 우주적 심장 박동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 존재합니다. 항상 ‘하나-둘, 하나-둘’과 같은 ‘부성과 모성의 심장 박동[Father-Mother heartbeat]’, 바로 영혼이 머무는 높은 천상에서 부성과 모성의 고동치는 리듬감을 표현해 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탄생과 재탄생[borning-reborning]’의 심장 박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대가들이라고 불릴만한 음악가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심포니는, 우선은 당신들이 귀를 통해 이를 듣게 되지만, 당신들의 영혼에 까지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서, 연주가 끝난 후에도 당신은 상상 속의 울림 속에 이 음악을 여전히 들을 수가 있듯이, 깊은 명상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지구 상의 모든 소리의 근원이기도 한 ‘침묵의 음악[the music of the silences]’도 늘 유사한 여파를 남깁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명상 속에서 전해 들을 수 있는, 이 낯설지만 아름다운 배음[harmonics]을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의 마음 속 상상을 가로막는 ‘저음들[undertones]’을 떠내려가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신이 ‘고동치는 심장박동[a pulsing heartbeat]’를 듣게 된다면, 당신은, ‘당신의 상상[your imaginings]’도 이 동일한 놀라운 리듬을 타고 오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머무는 높은 천상에서, 당신은 결코 ‘하나-둘-셋’과 같은 왈츠 리듬을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당김음[syncopation]은 이내 당신을 다시 지구로 끄집어 내려, 당신의 육체가 갖는 감정[EMOTIONS]과 감각[SENSES]을 인식하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둘-셋’과 같은 세박자 리듬은 당신이 육체적으로 춤을 추고 싶도록 만듭니다. 물론 이것도 육체적인 행복감을 더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리듬은 ‘근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original creative thought]’를 심하게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바램’ 자체가 지구상의 감각에 깊게 뿌리내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즈의 보다 중후한 당김음[the deeper syncopation of jazz]이 그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천상의 침묵 소리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깊은 공허[deep void]’의 소리일 뿐입니다. 재즈 음악은 자연의 리듬을 쪼개어 불균형한 리듬 상태로 가져 갑니다. 따라서 이를 듣는 사람들도 자신의 영혼을 ‘우주적 영혼[the Universal Soul]’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고평가될 수도, 저평가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고를 생성해 내는 영혼의 창조[thought-producing Soul creation]’ 과정과는 잘 부합되지 못합니다. 이는 정확히 당신이 지금 피하려고 하는, 물질적인 어떤 것을 향해 오히려 더 나아가는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신들이 육체적인 감각을 흥분시켜줄 수 있는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지구상의 리듬과 천상의 리듬 사이의 적절한 배분이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음악들도 물론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둘-셋’의 박자를 형성하는 왈츠 리듬 같은 것입니다. 당신들은 높은 천상에서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도 영예롭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지구상의 리듬’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은, 오직 한 줌의 흙덩어리가 되어 살아가는 것에 다를 바 없고, 지구의 노예가 되어 지구에 감금되고 마는 일로서, 불멸의 빛이 존재하는 높은 천상을 향해서는 결코 높이 날아오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필멸성[Mortality]’은 ‘감옥의 독방[prison cell]’과도 같은 것으로, 당신이 그곳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이는 오직 ‘당신이 가진 불멸성의 날개[the wings of your immortality]’를 다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했던 것은 ‘놀라운 불멸의 자아[wondrous immortal Self]’와 접촉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두 가지 주제를 혼동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Violinio Germain, 비올리니오 저메인
피닉스 저널 제 34권, “Phone Home, E.T. : Reach Out And Touch Someone—Like God!”, Pleiades Connection Vol. V. 제 3장, pp. 33-48.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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