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분의 1초)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평생동안 그런 자리가 있고, 제가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그런 자리에 던져져도 마땅하다고 믿어왔다면
무엇이 영원히 그런 곳을 창조하는 저 자신을 막아줄 수 있습니까?
네 앎과 이해가.
이승에서 너희의 다음 번 순간이 너희가 지난번 순간에 얻은 새로운 이해들에서 창조되듯이,
소위 저승에서도 너희는 앞서 알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순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거기서 금방 알고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너희는 언제나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후에는 결과들이 즉각 나타나기 때문이니,
너희라도 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런 생각이 창조해내는 체험 사이의 연결관계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자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행복한데,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무서운지,
또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의미심장한데 ,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실상 무의미한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 직후의 순간들에 벌어지는 상황을 놓고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도요.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돌아와
두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겁에 질려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요.
영혼은 마음의 가장 강력한 제안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빚어낸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 -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반면에 재빨리 자신을 적응시켜 그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당장에 새로운 체험들로 옮아가는 영혼들도 있다.
당신 말씀은 사후라고 해서 상황이 존재하는 무슨 특별한 방식 같은 건 없다는 건가요?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같은 건 없다는 겁니까?
죽음을 거쳐 다음 현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신화와 전설과 가상 체험들을 만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구속에서 풀려나는 건 언제입니까?
언제쯤에야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까?
너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이 바로 로빈 윌리암스 영화의 핵심이고, 여기서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존재 전체의 영원한 진리를 알고, 그 위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며,
그 웅장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바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아니다, '위대한 유일 진리'는 있고, '종국의 실체'Final Reality는 존재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런 현실에 관계없이 언제나 너희가 택하는 바를 가질 것이다.
신성한 피조물인 너희는 너희의 현실을 성스럽게 창조하고 있다는 것
- 때로는 그것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 바로 이것이 그 실체이기에.
하지만 너희가 개별 현실을 창조하길 그만두고 더 큰 현실, 통일된 현실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싶어한다면,
너희는 당장에 그렇게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런 선택과 그런 바램과 그런 의지와 그런 앎의 상태로 '죽는' 사람들은
당장에 '하나됨'Oneness('하나임'으로도)의 체험 속으로 옮아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경우에만,
바라는 만큼만,
또 바랄 때만,
비로소 그런 체험 속으로 옮아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램의 문제, 선택하고 창조하는 문제, 궁극에 가서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는 문제,
다시 말해 이미 창조된 것을 체험하는 문제다.
이것은 '창조된 창조자'The Created Credtor요, '부동의 동인' 이다.
그것은 알파요 오메가며, 전이자 후이고,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삼라만상의 지금 - 그때 - 항상의 측면이다.
나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너희에게 나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원할 때마다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
또 너희는 원할 때마다 개별 자아의 체험을 다시 창조할 수도 있다.
그것이 존재 전체의 가장 미세한 부분이든 아니면 가장 큰 부분이든,
너희는 원하는 모든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는 미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고, 거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다.
나는 미립자를 체험할 수도 있고, 바위를 체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 잘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너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머물 때, 너희는 전체보다 작은 부분, 즉 미시우주의 부분을 체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가장 작은 부분이란 의미는 아니다.)
반면에 너희가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일부에서 '영계'라 부르는 상태에 있을때),
너희의 시야는 기하급수로 확대된다.
갑자기 뭐든 알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그때 너희는 거시우주 관점을 가질 것이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너희가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다시 또 더 큰 거시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 전체는 너희가 그 시점에서 체험하는 현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게 갑작스레 분명해지리니,
이것은 당장에 너희를 경외심과 기대감, 경탄과 흥분, 기쁨과 들뜸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고 이해하는 것, 즉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도 알고 이해할 것이기에.
- 신과 나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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