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공간이동은 신비가 아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간은 그 실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좀 더 확실히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본래적인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면
90마일의 길을 가는 데 피곤하게 닷새 동안이나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상의 차원, 즉 본래적인 자기는
그 거리가 얼마가 되든지간에
즉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적인 공간이동은 신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희들의 차이는 단 하나,
전능한 유일자이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능력을
여러분보다 저희가 좀 더 많이 개발했다는 것뿐입니다.
소위 완전한 법칙(a perfect law)을 사용하면 그러한 일이 가능합니다.
저는 제 방에서 상념을 통하여
저의 육체의 진동을 높여
저의 육체를 보편 세계로 환원시켰습니다.
즉 저의 육체를 모든 실체가 존재하는 보편세계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의 신적인 자아의 상념인
그리스도 의식을 통하여 저의 육체가
지금 이렇게 보이는 모습으로 형태를 취할 때까지
육체의 진동을 떨어뜨렸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신비도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통하여
저에게 주신 능력과 법칙을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는 밖에 있는
그 누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
그리고 인류 전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비란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가 땅에 심어져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예수의 겨자씨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들 내면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편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즉 아주 작은 겨자씨 속에 미래의 커다란 나무가 배태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우리들 안에 이미 탄생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보편세계와 연결된 우리들 안에 있는
일종의 수용기관인
그리스도 의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그리고 일단 그리스도 의식을 통하여
어떤 상념이 들어오면
그 상념을 우리들 의식의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
거기 머물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성령의 역사에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의미가 잡힙니까?
마음과 목숨과 뜻,
모든 것을 우주적인 자아(Whole-I-Spirit)인
성령의 활동에 맡기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이 하느님의 성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어오는데,
대개는 겨자씨처럼 미미한 존재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겨자씨처럼 미미한 존재로 들어오는 성령을 받아들여
믿음의 씨앗과 결합시킨 다음,
주변의 물이 중앙에 형성된 얼음 조각이 엉기면서
점차 얼음으로 변해간 것처럼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생각들을 회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점점 외부로 표현되기 시작하고
우리가 지속할수록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
마침내 태산처럼 커다란 문제라도 '움직여 바다에 빠지라.'라고
명령하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 초인생활
출처 : 레드아우라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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