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

네 느낌과 체험에 귀를 기울이며, 결코 간청하지 마라. 감사하라

빛몸 2018. 8. 14. 07:24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을 알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을 알 수 없다.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의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는 너희가 나한테 너희의 진리를 말하는 짓을 그만둘 때까지는 내 진리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신에 관한 내 진리는 당신한테서 온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가?

 

 

다른 사람들이요.

 

 

어떤 다른 사람들?

 

 

지도자들. 목사들. 랍비들. 사제들. 책들. 거기다 성서도요!

 

 

그런 것들은 믿을 만한 출처가 못된다.

 

 

그것들이 믿을 만한 출처가 아니라구요?

 

 

그렇다.

 

 

그럼 뭐가 믿을 만한 출처인가요?


 

네 느낌에 귀를 기울여라.

네 가장 고귀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라.

네 체험에 귀를 기울여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네 선생들이 말한 바나 네게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다면, 말들 쪽을 잊어버려라.

말이란 건 가장 믿음직스럽지 못한 진리 조달업자이다.

 

 

당신한테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어째서 당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죠?

진실로 신이 존재하고, 당신이 바로 그라면,

왜 당신은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나는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그렇게 해왔으며, 지금도 또 한 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아니고, 반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확연한 드러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컨대 바로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어디 계시는데요?

 

 

네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

 

 

아니, 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식 말입니다.

 

 

그게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는 건가?

너는 나를 어떤 형상, 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려는 거냐?

 

 

당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형상이나 모습으로요.

 

 

나는 너희가 이해하는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누구나 하나같이 자기네가 본 것이 신의 많은 형상이나 모습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형상이자 모습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가 보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자기네가 보는 대로의 존재인 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특정 순간에 화()한 무엇이 아니라,

위대한 보이지 않음’Great Unseen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아닌 것이 나다.

나는 없음am-notness에서 나오고 항상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내가 특정의 형상, 곧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형상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그 형상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야 했다면,

앞서 나를 본 사람들은 이들에게, 나타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네에게 나타났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똑같은 것을 말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나일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 자신을 어떤 형상,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어떤 형상을 하든 반박할 수 없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입증해줄 행동을 한다면.......

 

 

.......그게 악마의 짓이라거나 그저 누군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들,

혹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전능한 신’,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드러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산을 옮긴다 해도,

그건 악마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통해 신 자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내면 체험으로 신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외부 관찰은 필요하지 않다.

또 외부 관찰이 필요하다면 내면 체험은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신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요청 행동 자체가 곧 신이 그곳에 없다는,

즉 신의 어떤 것도 지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에.

그런 진술은 그런 체험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생각은 창조력을 갖고 있고,

너희의 말은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생각과 말은 함께 어우러져 너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신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체험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청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말씀은 원하는 어떤 것도 청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것을 오히려 밀쳐낸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 되어 온 질문으로,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항상 답해주었다.

하지만 너희는 내 대답을 듣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용어와 지금의 언어로 그 질문에 다시 답해주겠노라.

 

그건 이러하다.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want는 너희의 진술은 정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wanting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다.

너희가 현실에서 체험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미리 신에게 감사할 때,

사실상 너희는 그것이....... 실제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감사는 신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진술,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해주는, 하나의 확약이다.

그러므로 결코 간청하지 마라.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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