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은 당신을 신이나 우주와 연결시켜주는 고리입니다.
그것은 당신만의 독특한 경험과 자각과 품성의 중심을
당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과 통합시켜주죠"
“가슴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무한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고요와 평화의 중심점이오”
“가슴은 삶으로도 통하고 저 너머 영원으로도 통하는 영혼의 입구죠.
가슴은 모든 고귀한 앎의 초시간적이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근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힘과 외부의 힘이 대등한 한 지점이요.
그래서 가슴 안에서는 신의 의지와 당신 자신의 의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죠.”
“가슴은 자력 중심이어서 당신의 모든 생명에너지가 이 위대한 발생장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가슴을 권능 있게 하면
그만큼 당신의 에너지 수준도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으로 높아지죠.
또 당신이 명확성과 결단과 확고부동함,의향과 고요와 존중,정의와 친절,위대성을 인식하는
능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가슴 안에서고요."
"가슴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무한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고요와 평화의 중심점이오.
어떤 존재가 무한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수준의 잠재력을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자신인 사랑과 한 영과 금강입자들이 가슴의 안내를 받아
자신들의 실존유형을 조립하니까요.
한 사람의 영혼은 그의 삶을 이루는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들,
경험과 행위와 희망과 꿈들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오.
가슴은 삶으로도 통하고 저 너머 영원으로도 통하는 영혼의 입구죠.“
“개개인들 속에는 그 존재의 신체적 영적 감정적 지적 의도적 구성요소들이
완벽한 공시성을 이루는 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요소나 시간, 공간, 조건 면에서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과 죽고 난 직후,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완벽하게 일치할 때는
그 사이 어느 때라도 맛보게 되는 ‘제로지점’이오.
이 성스런 자리에서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와 영원히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심하게 타락했는가와는 관계없이요.
그 지점은 참된 단순성의 지점이기에 아버지와 완벽한 교감을 나눌 수 있소.
당신이 그렇게 할 때마다 당신의 삶은 갱신되거나 변화될 겁니다.
가슴은 자력 회오리여서 본질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축복들이
이를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통합되고 생명력으로 집중됩니다.
이렇게 모아진 힘은 전자기의 법칙에 따라 생명에너지로 전환됩니다.
본질적으로 자기磁氣적인 가슴은 끌어당기고 받아들이는 무구한 자각을 매개로 할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나누고 튕겨내는 심판행동들은
가슴으로 들어가는 문을 당신의 등 뒤에서 닫아버리고 말죠.
그러니 당신의 가슴을 강하게 하려면,
먼저 무구함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슴을 권능 있게 할수록 그것은 당신에게 더 넓은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그냥 삶에 대한 열정이 더 커지고,
편하게 자고, 더 소화가 잘되는 정도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건 가슴이 그의 건강과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슴의 중요성과 그 성과를 더 많이 긍정할수록,
그대의 삶은 더 풍성한 열매들을 수확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대는 더 과감한 변화들을 이뤄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네.
그러다가 마침내는 당신의 가슴을 찾아감으로써 얻게 된 성과가
당신의 가장 황당한 꿈까지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지닌 에너지 수준도 그 형태와 성질에서 바뀔 테고요.“
“물질존재를 포함하여 모든 현실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무한에서 솟아납니다.
무한은 일차 원인으로서 신과 일치하죠, 신의 자녀인 당신 또한 무한과 일치하고요.
무한한 신은 한없는 잠재력으로,
이 잠재력은 처음에는 자각으로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사랑으로,
다시 그 다음에는 영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한대로 배열되는 금강입자들의 무한한 공급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신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들은 무한의 일부이지,
거기서 기인한 구조의 일부가 아님을 아시오.
당신은 영원히 당신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 우주로서는 무한의 일부인 당신을 포용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신의 무한을 확장시켜주는 팽창점이요.
당신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고지가 바로 당신 가슴이고요.
가슴은 당신이 신에게서 받은 선물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아버지를 영원히 묶어주는 끈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물었다
“우리는 본래 하나가 아닌가요?
그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은 이미 존재하는 거고요.
왜 다른 것이 필요하죠?”
“만일 당신이 스피커가 하나인 모노 라디오를 가지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완벽하고 무한한 사운드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 라디오가 스테레오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사실 거룩한 아버지는 무한의 근원인 하나이고, 한 무한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위대함은 그 너머로 확장하여 스테레오적 무한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 냈어요!
보다시피 아버지의 단독 무한은 그 자녀에 앞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녀와 함께하는 것이 스테레오 우주의 살아있는 본질입니다.
자녀가 없다면 스테레오적 실존, 다시 말해 무한대의 관점에서
무한대의 원리를 덧붙여 만들어내는 현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우주의 비옥함이자, 모든 것의 깊고 깊은 완결입니다.“
“무한을 계속해서 확장하는 데 있어 당신들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
당신들은 별도의 차원이요!
가슴은 이 별도의 차원을 이루게 해주는 문이고요.
그것은 당신들의 고귀한 지성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정신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신은 하인이요.
따라서 그것은 고급한 정통 지성을 갖지 못합니다.”
“성스러운 가슴은 우리 몸에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위치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척추와 심장사이,
심장에서 위로 2.5센티에서 그 아래로 7.5센티 정도 사이에 있습니다.
(초록길: 기존 번역서에는 ‘심장에서 위로 2.5센티에서 7.5센티 정도 올라간 곳’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체 비율과 성스런 가슴보다는 약간 아래쪽에 있는
그 사람의 중력 중심에 따라 좌우됩니다.
심장은 전체로 보면 몸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있긴 하지만,
심장의 진짜 축은 몸의 정가운데에 있습니다.
성스러운 가슴은 필멸의 삶과 영생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라즈예수
깨어남의 임계점을 형성하는 것은 지성적 이해가 아닙니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나요?
그것은 당신의 가슴과 저절로 연결됨입니다.
이것이 깨어남의 임계점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슴 속을 들을 때, 혹은 텅 비어있음을 속을 들을 때, 당신이 침묵을 들을 때,
당신은 가슴의 혹은 영혼의 경험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를 가질 것인데,
그 의미는 당신의 생각, 당신의 이성적 마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경험이 그 자체로서 완전할 것이기에
당신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의 이성적인 마음을 사용해서
이제 당신이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표현 할 것입니다.
[해피타오의 한바다님]
아가페의 중심은 흉선, 갑성선 호르몬 등의 분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가페의 중심은 가슴 약간 뒤쪽에 있는 씨알만한 크기로 존재하며,
예지의 중심에서 오는 고차적 우주 에너지, 즉 빛의 파동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소유욕이나 저급한 상념에 물들지 않는 참사랑의 근원이다.
남녀간의 일반적인 사랑도
이 센터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지원받지만,
이때는 소유욕이나 편견, 또는 과거의 경험 등이 묻어 나가는 상태로서
완전한 사랑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아가페의 중심은 예수가 말한 사랑과 붓다의 자비로 표현되는,
한계 없고 조건 없는 사랑의 자리이다.
평화와 지순한 행복도 이 센터의 기능이다.
이것은 감정의 빛깔을 타고 나타나지만,
흔히 말하는 감정과는 아득히 먼, 순결하고 영롱하며 아름다운 감정이다.
아가페의 중심은 붓다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문이라 볼 수 있다.
사고나 감정이 떨어져 나갔을 때 인식되는 ‘참나의 세계’ 는 바로
이 가슴 뒤에 있는 씨알만한 자리에 대한 감각을 가리킨다.
하지만 진정한 참나는 미세한 자의식마저 떨어져
상위에서 오는 빛이 이 중심까지 내려왔을 때만 지각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가슴 열림’ 이라고 하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해탈권의 초입 상태다.
영어로는 인라이튼먼트(enlightment), 즉 빛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고대 한국의 선학 체계에서는 명(命)이라 불렀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의 세계이다.
우리가 동물성과 소유욕, 분별심과 탐욕, 파괴적 본능과 질투를 초월하고
참된 인간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이 자리까지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이기심과 분별심, 탐욕에 물든 지구권 인류의 진정한 과제라 볼 수 있다.
이 중심의 신비로운 점은,
수련이나 명상을 통해서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명상과 수련을 통해 이 중심을 각성시킬 수 있는 기초적 에너지원은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계로 오려면 우선 양심과 진실이 살아 있어야 한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응,
그리고 이해와 배려,
수용력은 가슴의 중심을 살찌운다.
진실과 사랑이 지극해지면 아름다움으로 변하게 되는데,
아가페의 중심은 순미(純美)한 아름다움의 지각(知覺)과 함께 열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 다음에 판단분별, 계산의 주된 원인인 동물적 이기심이 완전히 포기되고,
의식과 잠재의식이 함께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사무쳐야 한다.
가슴의 중심의 핵심은 ‘무조건적으로 베풀라!’ 이다.
만일 단 하루라도 무조건적으로 베풀 수 있다면,
아가페의 중심은 순간적으로 열린다.
비록 완전히 열리지는 않더라도,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참사랑의 파동에 감응하고,
붓다권의 의식군(群)들과 만나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가장 확실하게 이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비전으로 내려온다.
그것은 이 중심이 완전히 열린 스승과의 만남에 의해서 가능하다.
만일 길을 떠난 사람이 이기적 마음 없이 스승에 대한 마음과 신뢰로 충만해 있을 때,
제자의 가슴은 스승의 가슴에서 나오는 무아경(無我境)의
신비로운 참사랑의 에너지에 감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감동을 통한 열림으로 비의적(秘意的)으로 전달된다.
가슴의 중심이 열렸을 때,
‘펑!’ 하고 마치 우주 전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들리며,
그의 의식은 빛과 사랑에 얻어맞은 것과 같은 체험을 겪게 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자의식을 이루던 세계 전체가 떨어져 나간다.
진정한 메타노이아, 성변화(聖變化)가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들은 이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중심은 그 속으로 들어갔을 때 중심이 없으며, 광대하고 무한하다.
중심은 딱딱한 어떤 상념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참사랑은 무한하며 한계가 없다.
아가페의 중심이 열렸을 때,
의식과 잠재의식 전체가 사랑의 파동을 먹게 되며,
잠재의식이 탈바꿈되는 것은 이 가슴의 중심이 열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만일 구도자가 삿된 에너지, 즉 이기심이나 탁한 음식, 저급한 감정에 물들지 않고
오랫동안 아가페의 진동의 영향을 받게 될 때,
의식체에 지복체(또는 미체)라는 에너지장이 형성된다.
이것을 신지학에서는 붓디체라고 불렀다.
붓디체는 윤회를 이끌던 자의식이 작용을 멎는 순간
“내가 님, 우주 속에 존재한다” 라는 자각과 함께 깨어난다.
구르제프는 이 아가페의 중심을 ‘상위 감성 센터’ 라고 불렀다.
http://dhsdudtofpa.blog.me/110165735832
[출처] 마음의 해방, 본체와의 합일-한바다님|작성자 본향연우
영적 심장- [라마나 마하리쉬]
라마나의 '죽음 체험'에서 핵심은
'에너지의 흐름'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임을 깨달았다 는 점이다.
이 흐름은 '비록 몸과 연결되어 일어나지만 '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직관적으로 이 존재감이
가슴 중앙의 몇 센티 오른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영적 심장'이라고 불렀다.
훗날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 경전에도 기술되어 있음을 발견 하였다.
의식 또는 에너지가 마음과 몸안에 있는 것은 단지 몸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이 다시 심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에는 영적인 심장의 반영된 의식이 있는 것이다.
영적인 심장만이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한다.
라마나가 지적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생각들이 오직 이 영적인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생각들은 여기에서 씨앗의 형태로 뭍혀 있다가
알맞은 상황을 만나 싹을 틔우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심장은 충만한 의식 또는 에너지이며,
동시에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나중에 '참나 탐구'를 의 장이나 다른 관련 장들에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영적 수행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1917년 8월 9일,라마나 마하리쉬는 영적인 심장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몸을 가진 존재들의 모든 생각은 영적인 심장에서 나온다.
그 심장에 관한 묘사는 마음의 개념들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나-생각'은 모든 생각의 근원이다.
'나-생각'의 근원은 영적인 심장이다.
이 심장은 우리 몸에서 피를 뿜어내는 내장 기관이 아니다.
이 심장이 뜻하는 흐리다얌(Hridayam)은 [이것이 중심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참나를 나타낸다.
이 심장의 위치는 가슴의 오른쪽이며 왼쪽이 아니다.
의식의 빛은 이 심장에서 나와 수슘나( Sushumn)경로를 통해 사하스라라(Sahasrara)로 흐른다.
의식은 사하스라라로 부터 온몸으로 퍼지며,그 뒤에 세계에 대한 경험이 일어난다.
자신을 그 의식과 별개의 것으로 봄으로써 인간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사로잡힌다.
참나에 거주하는 자의 사하스라라는 오직 순수한 빛이다.
그것에 다가가는 어떤 생각도 살아남지 못한다.
대상들이 가까이 있어 지각된다 해도,
마음은 다름을 보지 않기 때문에 요가(하나임)는 방해받지 않는다.
대상이 감지될 때에도 지각이 확고한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니르비칼파 사마디 상태에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이 없다.
온 우주가 몸안에 있으며, 온몸은 영적인 심장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영적인 심장속에 있다.
우주는 마음 안에 있을 뿐이며,마음은 바로 영적인 심장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역사는 영적인 심장안에서 정점에 이른다.
태양이 달에게 빛을 주듯이,영적인 심장은 마음을 비춘다
[ 이 세상은 해.달.물 삼원(三元)의 조화(造化)다.]
태양이 지고 밤이 되면 달빛만 보이듯이,
영적인 심장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만을 보게 된다.
의식의 진정한 근원이 자신의 참나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상들이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마음으로 지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심장에 거주하는 <아는자의 마음>은
한낮의 햇빛 속 달빛처럼 영적인 심장의 의식에 녹아들어 있다.
지성을 뜻하는 반야(Prajnana, 초월적 지혜)의 글자 뜻은 마음이지만,
현자는 이 말의 본질적인 의미가 영적 심장임을 안다. 지고의 존재는 영적 심장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차이는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영적인 심장에 거주하는 자들에게는 이 지각이 나뉘지 않으며 하나다.
기절이나 수면,지나친 즐거움 또는 슬픔,두려움 등으로 인해 생각이 강제로 멈출때,
마음은 자기의 근원인 영적인 심장으로 되돌아간다 .
이러한 몰입은 무의식중에 일어나므로 그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와 달리 의식하며 영적인 심장으로 들어갈 때,그것을 (Samadhi)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에 차이가 있다.
여섯 아다라(adhara) 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지바(개별영혼)는 영적인 심장 안에 거주합니까?
그렇다, 지바는 깊은 잠을 잘 때는 영적인 심장속에,
깨어 있을 때는 뇌 속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피를 내보내는 네개의 심실로 이루어진 육체적 심장이 아니다.
경전들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나'라는 개념이 일어나는 곳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즉 가슴의 중앙 오른쪽 어디에선가 생겨난다.
그러나 사실은 '나'가 특정한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 심장은 '나'라고 여겨지는 우리의 온몸과 온 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인 구도자의 수행을 위해 우리는
우주 또는 몸의 특정한 한 곳을 가리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심장이 참나의 자리로 지적된다.
그렇다면 속박되어 있는 사람과 해방된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적인 심장으로부터 힘의 자리인 사하스라라까지 이어지는 미묘한 경로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영적인 심장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채 머리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갸냐 시다(jnana siddha)는 영적인 심장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돌아다니거나 사람 또는 사물과 관계할 때에도,
자신이 보는 것들이 하나의 실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안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방금 얘기 했듯이 그는 사물을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세상으로부터,자신의 깊은 진리로 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자신을 지탱시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뒤에, 세상의 뒤에 하나의 실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그는 그 하나를 실재로서,모든 자아들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 안에 있는 참나로서,
덧없고 변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그것으로서 알고 있다.
(그것은,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일치되어 있다)
스승님 께서는 영적인 심장이 개별자아의 중심이며 또한 진실한 참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영적인 심장은 자아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자아는 일시적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자아 역시 영적 심장 중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아는 영혼과 물질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그것은 매듭이며,사람들이 빠져 있는 근본적인 무지의 매듭이다.
적절한 수단으로 이 매듭을 완전히 잘라 버릴 때,그대는 이 중심을 발견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이 중심에서 사하스라라까지 연결된 이동 경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통로가 닫혀 있지만,
자아의 매듭을 잘라 버린 사람들에게는 암리타나디(amritanadi)라고 하는
힘의 흐름이 일어나서,머리의 왕관인 사하스라라를 향해 상승하게 된다.
이 통로가 수슘나입니까?
아니다. 이것은 해방의 통로이다.
이것은 아트마나디(Atmanadi),브라마나디(Brahmanadi),또는 암리타나디(Amritanadi)라고 불린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나디는 이것이다.
이 통로가 열릴 때,그대의 무지는 그친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의식의 빛이 쐬이는 것이다.)
그때는 얘기하거나 생각하거나 어떤일을 할 때에도,
혹은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하고 있을 때에도 진리를 알고 있다.
만약 참나의 위치를 몸의 어떤 장소에 고정시킨다면,
무한하여 어디에나 현존하는 참나를 유한한 것으로 한정하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참나가 육체의 영적 심장에 있다고 한다면,육
체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가 참나에게도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슈리 라마도 바시슈타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바시슈타에게는 두 종류의 심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디에나 현존하는며'받아들여야 하는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한정되며'거부해야하는 심장이다.
어디에나 현존하는 심장은 안에도 밖에도 있으며,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그것은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다.
두 눈썹 사이의 지점에 주의를 집중하는 명상은 괞찮습니까?
영적 심장 중심이 있는데,왜 그곳으로 곧장 가지 않고 다른 중심을 거쳐서 가야 하는가?
첸나이에서 티루반나말라이로 가려는데,왜 바라나시까지 먼 길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가?
왜 곧장 가지 않는가?
심장 동굴의 중심에서 브라만이 홀로 빛난다.
참나는 그렇게 '나-나'로서 직접 체험된다.
자기탐구를 통하여 혹은 호흡을 조절하여 그 심장 속으로 녹아 들어가라.
그리고 '그것'으로서 뿌리를 내려라.
영적 심장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심장은 영적 체험의 중심이다.
그대가 영적 심장의 위치를 묻는 까닦은
자신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 위치가 육체에 있다고 하는 것이 진실이다.
여기에서 암시하는 바는 그대의 정체성과 관련된 심장의 위치이다.
그대는 참된 의식을 찾고 있다.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자기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내면을 향하라.
영적인 심장은 자각의 자리 혹은 의식 그 자체이다
http://blog.naver.com/weca1/40147614877
[출처] 영적 심장 ㅣ 그대 자신을 알라 / 라마나 마하리쉬|작성자 빛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