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킨스 대사님

진아 지(眞我 知)에 이르는 길 - 데이비드 호킨스

빛몸 2022. 3. 11. 14:54

진아 지(眞我 知)에 이르는 길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혁명 저자)
  

 

참존재는 고요하며 평화로운 상태를 안겨준다. 그 평화로운 상태는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그 존재성과 체험을 갖게 하는 공간이다. 참존재는 무한히 부드러우면서도 바위처럼 굳건하다. 참존재와 더불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한 레벨에서 영적인 환희가 일어난다. 시간에 대한 체험이 멈추기 때문에 근심이나 고통, 후회, 기대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어떤 상실이나 비탄도, 갈망도 없다. 이루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완전하고 완벽하다.

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문제들이란 단지 지각의 관점이 지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참존재가 현존할 때 마음이나 몸과의 동일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침묵할 때는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도 사라지고 순수한 앎이 드러나 자기 자신을 비춰준다. 참된 자신은 모든 세계와 우주, 시간을 넘어서서 존재하고,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앎의 상태에 어떻게 도달하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 이르는 방법들이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사람의 경우(호킨스)의 경우에는 우선 그런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그 다음에는 누구든 예외 없이 용서하고 따듯하게 대하려는 마음자세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럴 때는 자신의 자아와 생각을 포함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자비로서 대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매 순간 욕망의 작용을 정지시키고 개인적인 의지를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찾아왔다.

매 순간 일어나는 느낌, 욕구, 행위를 모조리 신에게 내맡기자 마음은 점차 고요해졌다. 처음에 마음은 모든 이야기와 이야기의 단편들을 놓아버리더니 그 다음에는 관념과 개념들을 놓아버렸다. 그런 생각들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고 반쯤 형성되었을 때 조각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생각자체의 배후에 도사린 에너지가 형상화되기 전에 그 에너지를 무화(無化)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리고 엄격하게 초점을 한 군데 모으고 단 한 순간도 명상하는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애썼다. 처음에는 아주 어려운 일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되어 점점 힘이 덜 들었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앎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참존재가 모든 것을 두루 포괄하면서 확연하게 거기 존재했다.

자아가 죽을 때는 잠시 두려움이 일었지만 참존재의 절대성이 경외로운 빛을 비춰주었다. 참존재가 드러나는 그 순간은 일찍이 체험했던 그 어떤 순간보다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그 깊디 깊은 충격을 참존재가 완화시켜 주었다. 사랑의 뒷받침과 보호가 없었더라면 소멸의 운명만이 기다렸을 것이다. 에고가 자신이 무(無)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에고의 존재에 매달리면서 공포스러운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에고가 죽자 모든 것인 참나가 대신 들어섰다. 모든 것이 알려지고 자체의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서 분명히 드러나는 전체가, 어떤 위치성도 동반하지 않은 앎이 일어났다. 참나는 모든 자기 정체성, 모든 성, 심지어 인간됨 그 자체도 넘어서는 전체적이고 완전한 존재다. 참나는 또 다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는 존재다. 이 시점에서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는 아주 하찮은 문제가 된다.

영적인 앎의 일정한 레벨들에 이르게 되면 몸의 병은 치유되거나 저절로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절대적인 상태에서는 그런 고려 사항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몸은 예정된 항로를 따라 나아가다가 그곳이 온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몸은 ‘나’로서가 아니라 ‘그것’으로써 나타난다. 방안의 기구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말이다. 몸이 마치 개인적인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몸을 상대로 해서 예전과 다름없이 말을 걸어올 때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앎의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다. 사회적인 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는 일은 참성품에게 맡겨두고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지복의 상태에 이를 때면 그 강렬한 황홀경을 감추기가 아주 어렵다. 주위 사람들이 그걸 보고 당혹해 할 수도 있고, 그에 동반되는 신성한 기운 곁에 앉으려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수도 있다. 영적인 탐구자나 영적인 데 관심 있는 사람들, 혹은 기적을 찾는 중환자 같은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지복의 상태는 그런 이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고 그들에게 환희를 안겨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대체로 이 시점에서는 그런 상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갈망이 존재한다.

이런 상태에 동반되는 황홀경은 확고하게 자리잡아서 일절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번민의 순간도 찾아 온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런 상태기 요동을 하다가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칠 때 찾아 온다. 그로 인해 한 동안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참존재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이러한 추락 상태는 그 길을 힘겹게 한다.

이런 반전 상태를 이겨내려면 엄청난 의지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레벨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은총으로부터의 하강’이라는 고통을 계속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럴 때 모든 양극과 그것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 당기는 상태를 넘어설 때까지 이원성을 초월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계속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그 황홀경의 영광은 버려야만 한다.

에고의 쇠사슬을 버리기는 여간 힘들지 않다. 그것은 마치 신을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지며, 과거에는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새로운 레벨의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고독에 대한 최종적인 공포심이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참으로 커서 그것이 다가오는 듯 할 때마다 거듭거듭 뒷걸음질 쳤다. 그런 고통과 영혼의 어두운 밤들이 겨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다.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이 커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때면 존재 자체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일단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마침내 전체 대 무(無)나, 존재 대 비존재의 이원성을 넘어서게 된다. 내적인 노력이 정점에 다다른 이런 상태는 가장 어려운 고비이자 최종적인 분수령이다.

거기서 자신이 일단 존재의 환상을 넘어설 경우 다시는 그것을 되 돌이킬 수 없다는 섬뜩한 사실이 그 마지막 장애를 더없이 두려운 선택으로 다가오게 한다. 그러나 사실, 자아가 궁극적인 종말을 고하는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 자기 정체성 그 자체는 보편적인 신성 속에서 용해되어 버리고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개인적인 의식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럴 때 그 마지막 단계는 신이 밟는다.

 

출처 : 의식 혁명(참나 찾는 공부방) 원문보기 글쓴이: 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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