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

( 신나이 ) 잠을 자는 이유

빛몸 2019. 7. 16. 15:06


닐 -

날마다 영혼이 몸을 떠난다고요? 언제요?

 

신 -

영혼이 더 큰 체험을 갈망할 때마다. 영혼은 이런 체험이 기운을 회복해준다는 걸 안다.

 

닐 -

그냥 떠나는 겁니까?

 

신 -

그렇다. 영혼은 항상 너희 몸을 떠난다. 너희 생애 내내 줄곧. 이것이 우리가 잠을 발명한 이유다.

 

닐 -

잠을 자면 영혼이 몸을 떠납니까?

 

신 -

물론이다. 그게 잠이란 거다.

너희가 그렇게 하려고만 하면, 영혼은 너희 생애 내내 주기적인 재충전으로 기운을 되찾으려 한다. 몸이라 부르는 이 탈것을 자신이 계속해서 끌고 다닐 수 있도록.

너는 영혼이 몸에 깃드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간단할지는 모르지만, 쉽지는 않다! 그건 기쁨일지는 모르지만, 쉽지는 않다. 그것은 너희 영혼이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너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가벼움과 자유를 아는 영혼은, 다시 한번 그런 존재상태가 되기를 갈망한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라도 여름방학을 애타게 기다릴 수 있고, 남들과 어울리기를 원하던 사람이라도 어울리는 동안 혼자이기를 갈망할 수 있듯이. 영혼은 가벼움이자 자유고, 정화이자 기쁨이며, 무한함이자 고통 없음이고, 완벽한 지혜이자 완벽한 사랑이라는 자신의 참된 존재상태를 추구한다.

영혼은 이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이상이다. 그럼에도 영혼은 몸을 갖고 있는 동안 이 소중한 것들을 거의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하고 의논했다. 영혼은 지금 선택하는 대로의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오래 몸을 가진 채 머물겠노라고 자신에게 통고했다. 다만 원할 때마다 몸을 떠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영혼은 소위 잠이라는 체험을 통해서 날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닐 -

"잠"이, 영혼이 몸을 떠나는 체험이라고요?

 

신 -

그렇다.

 

닐 -

전 우리가 잠을 자는 건 몸이 휴식을 필요로 해서라고 생각했는데요.

 

신 -

네가 잘못 알았다. 그 반대다. 영혼이 휴식을 원하기에, 몸더러 "잠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영혼이 몸을 가진 데서 오는 그 한계들에 지치고, 그 힘겨움과 자유 없음에 지쳤을 때, 영혼은 말 그대로 몸을 쓰러뜨린다(때로는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혼이 "재충전하려"할 때, 영혼이 그 모든 비진리와 거짓현실과 상상으로 그려낸 위험들에 지쳐 기진맥진해졌을 때, 영혼이 다시 한번 연결되고, 확인 받고, 휴식하고, 마음을 위해 다시 깨어나고자 할 때, 영혼은 그냥 몸에서 떠나버린다.

몸을 처음 받아들이는 영혼은 그것이 극히 힘든 체험이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은 특히나 새로 도착한 영혼에게는 대단히 피곤한 체험이다. 아기들이 잠을 많이 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한번 몸에 소속되는 최초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면, 영혼은 그 면에서 참을성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이제 영혼은 좀 더 오래 몸에 머문다.

이와 동시에 마음이라 불리는 너희 부분은,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대로 망각 속으로 옮아간다. 이제는 덜 빈번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체로 하루를 주기로 해서 이루어지는, 몸을 벗어나는 영혼의 비행조차 마음을 항상 기억으로 데려가 주지는 못한다.

사실 이 시기 동안 영혼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 있고, 이 때문에 너희는 존재 전체로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여기서 뭘 창조하고 있지?"라고 묻게 된다. 이런 탐색은 변덕스런 여행,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여행, 너희가 "악몽"이라 부르는 여행을 불러올 수 있다.

때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 영혼이 위대한 회상remembering의 자리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제 마음은 각성을 얻게 되니, 덕분에 영혼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몸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의 전존재가 이 같은 원기회복을 더 많이 자신할수록, 그리고 그것이 몸을 가지고 하는 것과 하려는 것이 뭔지 더 많이 기억해낼수록, 이제 자신이 이유가 있어서, 목적을 갖고 몸으로 왔음을 아는 너희 영혼은 몸에서 벗어나기를 덜 원하게 된다. 이제 영혼의 바램은 그 목적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 자신이 지닌 몸을 가지고 그 모든 시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잠을 잘 필요가 거의 없다.

 

닐 -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잠을 필요로 하는가로 그 사람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 -

거의 그렇다. 거의 그렇다고 말해도 좋을. 하지만 영혼은 이따금 순전히 몸에서 벗어나는 기쁨만을 위해 몸을 떠나기도 한다. 마음을 위해 다시 깨어나고, 몸을 위해 기운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임'을 아는 황홀경을 다시 창조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일수록 덜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항상 타당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자신이 몸을 가지고 뭘 하는지와 자신은 몸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임을 더 많이 자각하게 될 때, 그들은 몸과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고 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그만큼 "잠을 덜 필요로 하는"것처럼 보이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나아가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망각과 영혼의 '하나됨' 둘 다를 한꺼번에 체험하려는 존재들도 있다. 이런 존재들은 여전히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부를 몸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훈련시킴으로써, '참된 자신'을 아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굳이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잃거나 하는 일 없이.

 

닐 -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죠? 어떻게 해야 이렇게 할do 수 있나요?

 

신 -

그것은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자각의 문제, 완전 자각 상태에 도달하는 문제다. 너희가 자각을 할do 수는 없다. 너희는 오직 완전한 자각일be 수만 있다.

 

닐 -

어떻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이 제게 줄 수 있는 도구들이 있을 텐데요.

 

신 -

이런 체험을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들 중 하나가 날마다의 명상이다. 이 도구를 써서 너희는 생명에너지를 정수리 차크라로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깨어있는" 동안에 몸에서 떠날 수도 있다.

명상을 하면, 몸이 깨어 있는 동안에 자신을 완전 자각을 체험하기 위한 준비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준비된 상태를 참된 각성true wakefulness이라 부른다. 이것을 체험하자고 굳이 명상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명상은 그냥 장치, 네가 말했듯이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체험하자고 반드시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너희는 앉아서 하는 명상이 존재하는 유일한 명상이 아니란 사실도 알아둬야 한다. 멈춰서 하는 명상도 있고, 걸으면서 하는 명상도 있으며, 일하면서 하는 명상, 섹스하면서 하는 명상도 있다.

참된 각성 상태에서 멈출 때, 그냥 너희가 가던 길에서 멈출 때, 가던 곳으로 가길 멈추고, 하던 일을 하길 멈출 때, 잠깐만 멈출 때, 그냥 너희가 있는 바로right그 자리에 그냥 "있을" 때, 너희는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대로right 된다. 아주 잠깐만 멈추는 걸로도 축복 받을 수 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봐라, 못보고 지나치던 것들을 알아차릴 것이니. 비 내린 직후의 짙은 흙 냄새와, 사랑하는 사람의 왼쪽 귀를 덮은 곱슬머리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건 또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걸을 때, 너희는 온갖 꽃들 속에서 숨쉬고, 온갖 새들과 함께 날며, 발 밑의 온갖 버석거림을 느낀다. 너희는 아름다움과 지혜를 찾아낸다. 아름다움을 이룬 곳 어디서나 지혜를 찾을 수 있고, 아름다움은 어디서나 이뤄지기 때문이다. 삶의 온갖 것들이 다 아름다움의 소재다. 그것이 너희를 찾아오리니, 너희는 그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그리고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할" 때, 너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명상으로, 따라서 그것을 너희가 자기 영혼에게 주고, 너희 영혼이 전부에게 주는 선물, 즉 공물로 바꾼다. 설거지를 하는 너희는 손을 타고 흐르는 물의 온기를 즐기면서, 물과 온기, 양쪽의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너희는 손가락의 명령에 따라 눈앞의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면서, 너희 분부를 따르는 심신의 작용에 흐뭇해한다. 저녁을 준비하는 너희는 이 양식을 너희에게 가져다준 우주의 사랑을 느끼면서, 너희 존재의 사랑 전부를 이 요리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그 선물에 보답한다. 사랑은 수프까지도 진수성찬으로 바꿀 수 있으니, 그 요리가 호사스럽든 소박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게 참된 각성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성적 에너지를 교환할 때, 너희는 '자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진실을 알게 되니, 연인의 가슴은 너희의 집이 되고, 연인의 몸은 너희의 몸이 된다. 너희 영혼은 자신이 더 이상 무엇과도 분리되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준비되어 있을 때 너희는 깨어 있다. 한번의 웃음, 가벼운 웃음만으로도 너희를 거기로 데려갈 수 있다. 그냥 한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웃어봐라,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냥 너희 가슴이 신비를 알아서, 너희 영혼이 그 신비가 뭔지 알아서. 그 사실에 웃어라. 많이 웃어라. 그 웃음이 너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치유해 주리니.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네가 나더러 도구를 달라고 하니, 내가 그것들을 주겠노라.

숨쉬기, 이건 또 다른 도구다. 길고 깊게 숨쉬고, 느리고 부드럽게 숨쉬어라. 에너지로 그득하고 사랑으로 그득한 삶, 그 삶의 부드럽고 달콤한 무(無)를 숨쉬어라. 너희가 쉬는 숨은 신의 사랑이니, 깊이 숨쉬어라.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아주 깊이 숨쉬어라. 그 사랑이 너희를 울게 하리니.

기쁨에 겨워 울게 하리니.

이제 너희는 너희 신을 만났고, 너희 신이 너희를 너희 영혼에게 소개했으니.

일단 이런 상태를 체험하고 나면, 삶은 절대 예전 같지 않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랐거나" 장엄한 황홀경에 빠졌던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상태가 영원히 변했기 때문이다.

 

닐 -

감사합니다. 이해합니다. 그건 간단한 행위군요.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순수한 행위요.

 

신 -

그렇다. 하지만 알아둬라. 몇 년을 명상해도 이걸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열려 있고, 얼마나 기꺼이 하는가에 달렸다. 그리고 어떤 기대든 기대에서 얼마나 떨어질 수 있는가에도.

 

닐 -

날마다 명상해야 합니까?

 

신 -

만사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하는 건 없다. 그것은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다.

어떤 영혼들은 자각하면서 걷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잠자면서 걷고 있음을, 의식 없이 걷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의식 없이 삶을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자각하면서 걷는 영혼들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들은 다른 방식을 택한다.

그들은 '하나됨'이 가져다주는 온갖 평화와 기쁨을, 온갖 무한함과 자유를, 온갖 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자 한다. 몸을 떨어뜨려 "넘어졌을"(잠잘) 때만이 아니라,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도.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영혼을 두고 흔히들 "그의 혼이 깨어났다"His is risen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 소위 "뉴에이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의식상승" 과정이라고 부른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말은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교류형태다). 그 모두가 자각 속에서 사는 것으로 귀착되니, 그렇게 해서 그것은 완전 자각이 된다.

그러면 너희가 마침내 완전히 자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너희는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자각하게 된다.

매일의 명상은 너희가 이것을 이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행과 헌신을 요구하고, 외부 보상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추구하겠노라는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비밀을 쥐고 있는 건 침묵임을 잊지 마라. 그러기에 침묵의 소리는 가장 달콤한 소리고 영혼의 노래다.

자기 영혼의 침묵보다 세상의 소리를 믿을 때, 너희는 길을 잃을 것이다.

 

닐 -

그러니까 날마다의 명상은 좋은 아이디어이군요.

 

신 -

좋은 아이디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방금 여기서 말한 것을 이해하라.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달콤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우는 많다.

기도 속에서 침묵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고요한 명상에서 비밀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번잡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에 이르거나 이따금이나마 그것을 체험할 때, 세상의 소음은 입을 다물고, 산란함은 가라앉는다, 설사 소음과 산란함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라도. 삶의 모든 것이 명상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것이 명상이다. 그 속에서 너희는 신성을 명상하고 있다. 참된 각성, 혹은 정신차림mindfulness이란 게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체험될 때, 삶의 모든 것이 축복 받는다. 더 이상의 투쟁이나 고통이나 염려는 없다. 오직 체험만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방식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 체험만이. 너희는 그 모두를 완벽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희 삶과 그 속의 모든 사건들을 명상으로 이용하라. 잠자면서 걷지 말고, 깨어서 걷고, 무심하게 움직이지 말고, 정신차려 움직이며, 의심과 두려움에 묵지 말고, 죄의식과 자기 비난에도 묵지 마라.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무척 사랑 받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영원의 광휘 속에 거하라. 너희는 언제나 나와 '하나'이니, 나는 너희를 영원히 환영할 것이다. 나는 너희의 귀가(歸家)를 환영할 것이다.

너희 집은 내 가슴속에 있고, 내 집은 너희 가슴속에 있으니. 나는 너희가 죽음에서 확실히 보게 될 이것을 삶에서도 보도록 너희를 초대한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죽음 따위는 없다는 것, 그리고 소위 삶과 죽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 같은 체험의 양면임을 알게 되리라.

우리는 존재하는 전부고, 지금껏 존재했던 전부며, 앞으로 존재할 전부, 끝없는 세상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