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수업

Work Book Lesson 186 “세상의 구원이 나에게 달려 있다

빛몸 2019. 11. 28. 06:59


기적수업 Work Book

Lesson 186

 

 

Salvation of the world depends on me.”

세상의 구원이 나에게 달려 있다.”

 

 

Here is the statement that will one day take all arrogance away from every mind. Here is the thought of true humility which holds no function as your own but that which has been given you. It offers your acceptance of a part assigned to you, without insisting on another role. It does not judge your proper role. It but acknowledges the Will of God is done on earth as well as Heaven. It unites all wills on earth in Heaven’s plan to save the world, restoring it to Heaven’s peace.

 

바로 여기에, 미래의 어느 날 모든 마음들에게서 오만함을 모두 치워버릴 문장이 있다. 바로 여기에, 너에게 주어져왔던 역할 말고는 다른 역할들을 너의 것으로 품지 않는 참된 겸손에 관한 생각이 있다. 이것[=오늘의 개념]은 네가, 또 다른 역할에 고집을 부리지 않고, 너에게 맡겨진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너에게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할 따름이다.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천국의 계획 속에 저마다 역할을 부여받은 지상의 의지들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그러는 가운데 세상을 천국의 평화로 회복시키고 있다.

 

 

Let us not fight our function. We did not establish it. It is not our idea. The means are given us by which it will be perfectly accomplished. All that we are asked to do is to accept our part in genuine humility, and not deny with self-deceiving arrogance that we are worthy. What is given us to do we have the strength to do. Our minds are suited perfectly to take the part assigned to us by one Who knows us well.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투지 않도록 하자. 그것[=우리의 역할]을 확립해놓은 것은 우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완벽하게 완수해낼 수 있는 수단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전부란 순수한 겸손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우리가 이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자기 기만적 오만으로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하라고 주어지는 것들을 해낼 수 있는 강함을 갖고 있다. 우리의 마음들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이에 의해서 맡겨진 역할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완벽하게 적합하다.

 

 

Today’s idea may seem quite sobering until you see its meaning. All it says is that your Father still remembers you, and offers you the perfect trust He holds in you who are His Son. It does not ask that you be different in any way from what you are. What could humility request but this? And what could arrogance deny but this? Today we will not shrink from our assignment on the specious grounds that modesty is outraged. It is pride that would deny the Call of God Himself.

 

오늘의 개념은, 네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기 전에는, 매우 무겁고 진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개념이 전하고 있는 바란, 아버지께서 지금도 너를 기억하고 계시며, 당신의 아들인 너에게 완벽한 신뢰를 주고 계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오늘의 개념]은 너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너 자신인 그것과 달라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겸손이 청할 수 있는 것이 이것[=‘너 자신인 바로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교만이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 우리는, 겸손이 짓밟히고 있다는 허울 좋은 이유들로 인해,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로부터 움츠려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부르심을 부인하려하는 태도가 바로 교만인 것이다.

 

 

All false humility we lay aside today, that we may listen to God’s Voice reveal to us what He would have us do. We do not doubt our adequacy for the function He will offer us. We will be certain only that He knows our strengths, our wisdom and our holiness. And if He deems us worthy, so we are. It is but arrogance that judges otherwise.

 

오늘 우리는 모든 거짓 겸손을 치워버린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시는 것들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역할에 우리 자신이 적합하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강함과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거룩함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다고 그분께서 생각하고 계시다면, 우리는 정말로 그러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식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만일 뿐이다.

 

 

There is one way, and only one, to be released from the imprisonment your plan to prove the false is true has brought to you. Accept the plan you did not make instead. Judge not your value to it. If God’s Voice assures you that salvation needs your part, and that the whole depends on you, be sure that it is so. The arrogant must cling to words, afraid to go beyond them to experience which might affront their stance. Yet are the humble free to hear the Voice Which tells them what they are and what to do.

 

거짓된 것이 참되다고 증명하려는 너의 계획이 너에게 가져다 준 감금의 상태로부터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실로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네가 만들어낸 계획 대신에, 네가 만들지 않은 계획을 받아들여라. 이 계획에 자신이 합당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음성이, 구원이 너의 역할을 필요로 하며 전체가 너에게 달려 있다고 너에게 보증하고 있다면, 실로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져라. 오만한 자들은 말들에 매달릴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말들을 넘어서, 자신들의 위치를 모욕할지도 모를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음성을 자유로이 듣는다.

 

 

Arrogance makes an image of yourself that is not real. It is this image which quails and retreats in terror as the Voice for God assures you that you have the strength, the wisdom and the holiness to go beyond all images. You are not weak, as is the image of yourself. You are not ignorant and helpless. Sin can not tarnish the truth in you, and misery can come not near the holy home of God.

 

오만은 너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나, 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이, 모든 이미지들을 넘어설 수 있는 강함과 지혜와 거룩함이 너에게 있다고 너에게 확신을 안겨줌에 따라, 공포에 떨면서 움찔하고 물러서는 것은 바로 이 이미지인 것이다. 너는 약하지 않다. 약한 것은 너 자신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너는 무지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죄는 네 안에 있는 진리를 변질시킬 수 없고, 불행도 하나님의 거룩한 집 가까이로 다가설 수 없다.

 

 

All this the Voice for God relates to you. And as He speaks, the image trembles and seeks to attack the threat it does not know; sensing its basis crumble. Let it go. Salvation of the world depends on you, and not upon this little pile of dust. What can it tell the holy Son of God? Why need he be concerned with it at all?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이 너에게 차근차근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이 말함에 따라, 이미지는 자신의 기초가 완전히 가루가 되는 것을 감지하고는 파르르 떨면서 자신이 모르고 있는 그 위협을 공격하려고 애쓴다. 그저 흘려 보내라. 세상의 구원은 바로 너에게 달려 있지 이 작은 먼지더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염려해야 하겠는가?

 

 

And so we find our peace. We will accept the function God has given us, for all illusions rest upon the weird belief that we can make another for ourselves. Our self-made roles are shifting, and they seem to change from mourner to ecstatic bliss of loved and loving. We can laugh or weep, and greet the day with welcome or with tears. Our very being seems to change as we experience a thousand shifts in mood, and our emotions raise us high indeed or dash us to the ground in hopelessness.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역할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들은 모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역할을 만들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는 역할들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것들은 슬퍼하는 이에서,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황홀한 축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우리는 하루를 환영할 수도 있고 눈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우리가 분위기에 있어 수천 개의 변화를 겪음에 따라, 또 우리의 감정들이 우리를 진정 저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거나 절망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침에 따라, 우리 자신의 존재도 그에 맞춰 변화하는 듯 보인다.

 

 

Is this the Son of God? Could He create such instability and call it Son? He Who is changeless shares His attributes with His creation. All the images His Son appears to make have no effect on what he is. They blow across his mind like wind swept leaves that form a patterning an instant, break apart to group again, and scamper off. Or like mirages seen above a desert, rising from the dust.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그토록 불안정한 존재를 창조하고는 그것을 아들이라고 부르실 수 있었겠는가? 변함이 없는 그분은 당신의 속성들을 당신의 창조물과 공유하고 계신다. 그분의 아들이 만들어내는 듯 보이는 이미지들은 모두 아들 자신인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이미지들은 그의 마음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니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낙엽들과도 같아 한 순간 어떤 패턴을 형성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다시 쏜살같이 달아나버린다. 또한 그것들은 모래에서부터 피어나는 사막 위의 신기루와도 같다.

 

 

These unsubstantial images will go, and leave your mind unclouded and serene when you accept the function given you. The images you make give rise to but conflicting goals, impermanent and vague, uncertain and ambiguous. Who could be constant in his efforts, or direct his energies and concentrated drive toward goals like these? The functions which the world esteems are so uncertain that they change ten times an hour at their most secure. What hope of gain can rest on goals like this?

 

너에게 주어진 역할을 네가 받아들이게 되면, 실체가 없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라져버리고 너의 마음을 그늘진 데 하나 없이 고요하게 내버려두게 될 것이다. 네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하는 목표들을 발생시킬 따름이다. 그것들은 일시적이며 막연하고 불명확하며 애매하다. 그 누가, 이와 같은 목표들을 향해서 한결같이 자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욕구를 하나로 모아 자기 에너지들의 방향을 거기로 이끌 수 있겠는가? 세상이 자랑해마지 않는 역할들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이어서, 세상의 역할들 중 가장 안전하다 할 만한 것도 한 시간에 열 번씩 휙휙 바뀌곤 한다. 과연 이와 같은 목표들에다 무슨 희망을 두어 이득을 볼 수 있겠는가?

 

 

In lovely contrast, certain as the sun’s return each morning to dispel the night, your truly given function stands out clear and wholly unambiguous. There is no doubt of its validity. It comes from one Who knows no error. And His Voice is certain of Its messages. They will not change and nor be in conflict. All of them point to one goal, and one you can attain. Your plan may be impossible, but God’s can never fail because He is its Source.

 

그러나 이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그래서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고맙게도, 아침이 되면 밤을 몰아내기 위해 태양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에게 진정 주어진 그 역할은 모호한 것 하나 없이 분명하게 우뚝 서 있다. 그 역할의 타당성을 의심해 볼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무런 오류도 모르시는 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도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들에 대해 확신하고 계신다. 그 메시지들은 변치 않을 것이고, 서로 충돌하는 일도 하나 없다. 그 메시지들 모두는 하나의 목적만을, 네가 달성할 수 있는 목적만을 가리키고 있다. 너 자신의 계획은 불가능한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곧 그 계획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Do as His Voice directs. And if It asks a thing of you that seems impossible, remember Who it is that asks and who would make denial. Then consider this; which is more likely to be right? The Voice that speaks for the Creator of all things Who knows all things exactly as they are, or a distorted image of yourself, confused, bewildered, inconsistent and unsure of everything? Let not its voice direct you. Hear instead a certain Voice Which tells you of a function given you by your Creator, Who remembers you and urges that you now remember Him.

 

그분의 음성이 이끄는 대로 하여라. 그것[=그분의 음성]이 너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요구한다고 생각되거든, 그것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거절을 하려는 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그런 후 다음의 질문을 고려하라. 어느 것이 더 올바른 것처럼 느껴지는가?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의 정확히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의 창조주를 대신해서 말씀하시는 음성인가? 아니면 너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불확실해 하며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해 하고 일관성이 하나도 없는 왜곡된 이미지인가? 그것[=이미지]의 음성이 너를 이끌게 내버려두지 말라. 대신 너의 창조주에 의해 너에게 부여된 역할에 대해 말하는 확실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너의 창조주께서는 너를 기억하고 계시고, 이제는 네가 그분을 기억해내기를 촉구하고 계신다.

 

 

His gentle Voice is calling from the known to the unknowing. He would comfort you, although He knows no sorrow. He would make a restitution though He is complete; a gift to you, although He knows that you have everything already. He has Thoughts which answer every need His Son perceives, although He sees them not. For Love must give, and what is given in His Name takes on the form most useful in a world of form.

 

그분의 온화한 음성은 네가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신다. 그분께서는 슬픔을 전혀 모르시나, 너를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완전하시나,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미 너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 너에게 선물을 주신다. 그분께서는 필요라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시나, 아들이 지각하고 있는 필요들 모두에 응답하는 생각들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주는 것임에 틀림없고, 그분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은 형태의 세상 안에서 가장 유용한 형태를 취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These are the forms which never can deceive, although they come from Formlessness Itself. Forgiveness is an earthly form of love which as it is in Heaven has no form. Yet what is needed here is given here as it is needed. In this form you can fulfill your function even here, although what love will mean to you when formlessness has been restored to you is greater still. Salvation of the world depends on you who can forgive. Such is your function here.

 

이 형태들은 형태가 없는 그것 자체로부터 비롯되며, 이 형태들은 결코 속일 줄 모른다. 사랑은 천국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형태도 없으나 지상에서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용서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 필요에 따라 여기에 그대로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 안에서 너는 너의 역할을 이곳에서도 완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형태가 없는 그것이 너의 기억에도 회복이 되고 나면 그때 사랑이 너에게 의미하는 바는 지금보다 훨씬 위대해질 것이다. 세상의 구원은, 용서할 수 있는 너에게 달려 있다. 이곳에서의 너의 역할은 참으로 이러하다.